계획서에도 비포애프터만한 게 없다

사업계획서, 업무계획서, 인생계획서...에 다 적용되는 그것

by 해서뜬 손유빈

지난 화에 이어서 오늘도 계획서 이야기를 준비했다. 이전 글에는 계획서를 쓰기 전 짚어봐야할 '왜'를 정리했다. 물론 꼭 이전 글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계획서를 왜 써야 하는지 어렴풋이 안다. 무계획으로 살다가는 허송세월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1월 1일 새해가 되면 또 아무 생각과 각오 없이 살지 않으려고 억지 위시리스트라도 쓰게 되는 법이다.


새해 결심으로 써내려가는 계획서는 의지로라도 쓸 수야 있지. 업무 계획서는 아무리 머리로 이해가 되어도 선뜻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뭘 써야 하지? 하면서 구글에 검색한다. 딱딱하고 어지러운 표들이 계획서 쓸 맛을 뚝 떨어뜨린다. 계획서를 왜 써야하는지를 1단계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본격적인 2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또 단계가 있다.


업무 계획서 쓰기의 1.5단계 : 비포애프터 파악하기

모든 일에는 비포애프터가 있다. 크게는 이 일을 업으로 삼기 전이 있을 테고, 작게는 어떤 프로젝트를 맡기 전이 있을 테다. 계획서의 핵심은 바로 이 상태를 주지하는 것에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큼의 태스크 처리 역량이 있는지 파악하고 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업무를 목록화할 수 있다. 메타인지 없이 계획서를 쓰면 갑자기 프로젝트의 신 되기 급의 허무맹랑하고 공격적인 계획서를 쓰게 된다. 내 수준이 얼마나 바닥인지만 열심히 확인한다.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 되어버릴 때도 많다. 그럴 때 1.5단계가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상품 기획 제안서라는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하자. 보통은 바로 상세 내용 작성(2단계)로 이렇게 쓴다.


- 시장 정보 레퍼런스 서치하기(7일 전)

- 상품 기획 내용 초안 작성(5일 전)

- 제안서 PPT 작업(3일 전)

- 제안 발표 초안 작업(1일 전)


언뜻 보면 나무랄 데가 없다. 당연하다. 이 프로젝트를 맡는 백이면 백, 이와 유사한 투두리스트를 쓸 거다. 시점도 정해져 있겠다, 일단 일에 뛰어든다. 이 목록화의 단점은 같은 목록인데도 컨디션에 따라 퍼포먼스는 아예 달라진다는 것에 있다. 어느 날에는 레퍼런스가 뚝딱 나와서 적의 목을 베듯 슥슥 해내는가 하면,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 헤매고 또 헤매다 야근을 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계획서가 나를 조종하는 상황이라 부른다. 열정이 아주 흘러 넘칠 때는 나를 몰아쳐서 이 리스트를 다 뽀개야만 프로직장인이 되는 줄 알았다.


1.5단계는 사실 별 것 없다. 이 일에 대한 내 자신감, 현재 수준, 이 일을 했을 때 들게 될 에너지와 시간을 예측해서 한 번 써보는 거다. 쓸 시간이 없으면 명상하듯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준 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나만의 일'로 내재화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1.5단계를 거친다면,

- 시장 정보 레퍼런스 서치하기 (지난 주에 스크랩해놓은 레퍼런스 있음, 시간/에너지 하)

- 상품 기획 내용 초안 작성 (안 해본 유형의 상품, 피드백 받아야 함. 시간/에너지 상)

- 제안서 PPT 작업(장표 전체 절반 중 지난 번에 작업한 레이아웃 활용할 수 있음. 시간/에너지 중)

- 제안 발표 초안 작업(기획 내용 초안에 연동해서 같이 하면 금방 끝남. 시간/에너지 하)


1.5단계를 거친다면, 내가 기준이 되는 계획서를 쓸 수 있다

누군가는 하상중하로 에너지를 쓰고, 누군가는 상중하하로 에너지를 쓸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들여다보는 계획서가 되려면 계획서에 내가 많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나중에 얘기하게 될 나의 비전과 미션을 쓸 때도 이 부분은 큰 도움이 된다.


1.5단계를 거친다면, 우선순위를 정리하기 쉽다

예시는 아주 간단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겠지만, 이런 업무의 종류가 두 가지, 세 가지, 다섯 가지로 늘어났을 때 업무 시간 효율에 혼란을 막기 위함이 크다. 나의 수준과 들일 수 있는 에너지를 정리하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에너지나 시간이 많이 들었을 때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일을 하는 건지 일이 나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 상태가 된다.


1.5단계를 거친다면, 변화를 목격하기 쉽다

계획서를 쓰면서 신날 때는 언제인지 아는가? 사실 없다. (계획서를 쓸 때 신나는 사람은 나는 뭔가 좀... 멀리하고 싶다..) 계획서가 효용을 발휘할 때는 결국 그 계획을 통해 달라진 나를 포착하는 것이다. 일의 실행을 위한 나열은 실행하고 나서 그 일의 결과값만 주어지지만(이마저도 잘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누적한 비포는 필시 나에게 애프터를 준다.


1.5단계를 거친다면, 나에게 여유를 줄 수 있다

정말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몸이 아파도 비슷한 퍼포먼스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정말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국 노예식 사고를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항상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복과 불운과 내 일을 따라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들여, 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1.5단계여서 초조함과 조바심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포애프터를 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떠오른 많은 생각들(나의 역량은 왜 아직 이모양이지, 이걸 더 잘하고 싶다, 나 이거는 역시 잘했었네 등등)이 있을 테다. 그게 계획서의 아주 소중한 재료가 될테니, 잊지 말고 꼬옥 챙겨 다음 스텝으로 함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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