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중요하면 다 안 중요한 거지 뭐

계획서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할 줄이야

by 해서뜬 손유빈


계획서를 왜 쓰고, 어떤 마인드로 쓰고에 대해 이전 화에서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다. '무엇을'을 쓸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업무를 나열해놓고 먼저 처리해야할 일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이다. 일을 다 놓치지 않기 위해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면 당연하게도 일을 처리하다보면 생기는 변수에 대응하기 어렵다. 새롭게 스케줄링이 끼어들면, 이전의 목록을 다시 재정비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img (1).jpg 리스트업해도 이 지경인 내 일 출처_대학일기

이럴 때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우선순위를 잘 세워야 해'라는 말이다. 계획서를 쓰는 나도 알고 있다. 우선순위를 '잘' 세워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어떻게? 그 좋은 우선순위가 내 일의 영역으로만 결부 지으면 흐물거리고 맥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다 내가 찾은 방법을 소개하겠다. '파레토의 법칙', '잡초뽑기', '상위 업무 설정' 이렇게 세 가지를 믹스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1. 파레토의 법칙

상위 20%가 전체 생산의 80%를 해낸다는 법칙이다. 업무에서도 고품질의 업무 몇 가지가 전체 업무의 질을 좌우한다. 예를 들어볼까? 상품을 만들고 영업을 해서 성과를 낸다고 생각해보자. 이 일도 쭉 나열하면 정말 많다. 시장 조사도 해야 하고, 이해관계자를 설득도 해야하고, 영업할 파이프라인도 구축해야 하고, 실제 성과와 연결 지을 세일즈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서 일하면 고객과 시장의 변수를 대처할 수 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20을 골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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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중에 20을 고르는 게 어렵다면,

진짜 중요한 것 세 개만 고르자. 사실 하나만 고르는 게 제일 좋다.


나는 위 업무에서는 판매할 무엇을 설정하기, 판매 대상에게 어필하기. 두 가지를 중심 축으로 생각하고 그 아래 이에 필요한 80의 업무를 정리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목표가 뚜렷해진다. 판매할 무엇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게 중요하지 제안서 장표가 7장인지 9장인지는 안 중요해진다. 우선순위가 아닌 일에 목숨 걸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결국 성과가 나도록 파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판매할 무엇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도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할 수 있다.


시장 조사도 중요하고, 설득도 중요하고, 파이프라인 구축도 중요하고, 제안서도 잘 만들어야 하고, 세일즈 전략도 허투루 짤 수가 없다. 사실 안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현재 나의 포지션, 조직의 상황을 생각해보고 결국 그 중 가장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전략적인 계획이다.


'전부 중요하면 다 안 중요한 거지 뭐'


내가 늘 하는 말이다.

진정 중요한 것을 고르지 않고 일을 하면 모든 게 다 중요해진다. 내가 원래 쥐고 있던 일도 중요하고, 내 목표 달성을 위해 당장 해야 할 일도 중요하고, 오늘이 꼭 아니면 안되는 일도 분명히 존재하고,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와 이 일이 제일 긴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요'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기해야 한다.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은 언제나 희소적이다. 이렇게 휘둘리며 다 중요하다면, 사실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일을 20과 80으로 나누다보면 일의 구조가 보인다. 20에서 파생되며 연결되어 처리되는 80이 보인다. 연결되지 않는다면 20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이 일이 아니면 목표나 성과를 달성할 수 없는지 질문하며 소거법으로 80의 영역을 지우고 진정 중요한 20을 뚫어져라 집중하는 것이 나의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2. 잡초 뽑기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라는 김창완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잡초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이런 말을 덧붙였더라고요. 그러니 스스로 잡초라 할 일이 아니네요. 용기를 갖자고요.


모두 다 어디선가는 잡초가 될 뿐이지, 사실은 다 각자의 개성이 있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읽고 조금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감자를 빼곡히 심어놓은 내 밭에 산삼이 자라고 있다면 내가 산삼을 키울 줄도 모르는데 감자를 키우다 말고 산삼에 몰두하여야 할까? 결국 내가 세운 목적과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싹을 잘라내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었다.


대뜸 산삼을 뽑자는 말이 아니라 잡초뽑기의 실체는 '두려움 제거'이다. 계획을 세우면서 의외로 내 업무적 능력보다 감정적인 영역이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버릇은 실행력을 떨어뜨린다. 물론 그 불안과 두려움 덕에 위기를 모면한 적도 많지만 목표 달성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계획서를 쓸 때도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세웠는데 못 이루면 어쩌지? 같은 잡초들이 자라난다. 나는 그것을 과감하게 없애려고 한다. 없애겠다는 신호를 계획서에 작성하기도 한다. 잡초 뽑기 자체를 하루 일과로 넣는 날도 있다. 나의 두려움과 불안 또한 내가 케어해야할 업무의 영역 중의 하나다.


3. 상위 업무 설정

상위 업무 설정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는가? 당연하다. 내가 만들어낸 이론이다. 이것의 반대는 나열식, 체크리스트식 업무 설정이다. 이 글 인트로에서 말했듯 일을 맡기면 목록화해서 도장깨기하듯 해치우려는 타입을 뜻한다. 업무를 나열해서 긴급하거나 당장 중요해보이는 기준으로 1순위, 2순위를 매기는 타입은 필연적인 업무 누락을 불러온다. 나열된 업무의 공통분모를 분석해서 그 업무 기반으로 다시 업무를 재정돈하는 방식이다.


이 부분은 조금 더 많은 예시를 곁들여 다른 화에서 디테일하게 다룰 예정이다. 이럴 거면 거의 계획서 쓰기 브런치북으로 연재를 할 걸 그랬나 싶기도. 어찌 됐든 사업도, 일도, 팀원 관리도 이 계획서 기반으로 구조화되어 이어지고 있으니 맥락이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겠다.


법인을 설립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하려고 하니까 특색이 없어지더라. 김치찌개 맛집으로 시작한 사업이 상호만 여러 개 내놓고 한 군데서 장사하는 배달 전문 식당이 될 뻔 했달까. 많은 순간 계획을 세우지만, 너무 촘촘히 세우지 않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내 관점에서는 이것이 중요했지만, 언제고 중요한 일은 새로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 계획을 방해할 것이다. 뭐든 후순위로 미뤄질 수 있음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고수해야할 제 1순위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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