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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집 Oct 17. 2023

굿바이, 뉴욕

반 백 살의 뉴욕 여행기(15)


ㅣ유종의 미


우린 한국을 가기 며칠 전부터 뉴욕과의 안녕을 위해 가볍게 시내투어를 다녔다. 더 이상은 힘들고 어렵게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관광이 아닌, 지난 여정을 추억하고 정리하는 마무리의 시간이었다.


자주 가던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 먼저 들렸다. 타임스 스퀘어는 맨해튼에서 가장 화려하고 붐비는 상업적 교차로이다. 지하철 42St. Times Square역에서 내리면 된다.


우리는 그저 정처 없이 거리와 상점을 구경하면서 다녔다. 가끔은 이런 무계획의 여행이 참으로 좋다. 그 어떤 것의 제약도 받지 않고, 걷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된다. 이러한 평화로운 시간은 소소하지만 새로운 풍경들을 선사해주곤 한다. 


너무 유명해서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장소나 풍경이 아닌, 그저 로컬들이 사는 일상적인 골목들, 가게들, 모습들...... 때로는 그런 우연한 만남들이 가슴에 더 오래 남기도 한다.

우연히 딸이 좋아하는 초콜릿 샵과 마주치게 된 것처럼......

노을이 질 무렵, 지하철 창문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하트처럼......


우연히 만난 전철 창문의 하트♡ & 초콜릿 가게


우리는 마냥 걷다 보니 어느덧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에 도착해 있었다. 사실 이곳도 유명한 장소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주 비교가 되는 곳이었다.

우리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하고 현대적인 조명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각종 샵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꿈틀거리는 쇼핑의 본능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른 우리는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NBC 기념품 티셔츠 하나를 사는 걸로 마무리했다.


참고로 록펠러 센터는 5번가와 6번가에 위치, 지하철 B, D, F 라인 47-50 St. Rockefeller Center역에서 내리면 되겠다. 각종 가게들과 음식점, NBC의 스튜디오, 록펠러센터 전망대(Top of the Rock)등이 있는 곳이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한데 갑자기 롤러스케이트장이 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잠시 눈을 의심했다. '이런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화려한 롤러스케이트장이?!' 적잖이 놀랐다. 한눈에 봐도 음악과 어우러진 사람들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구경하고 있자니 부러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오빠 손을 잡고 자주 갔던 롤러스케이트장이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지 아마... 이렇게 좋게 곱씹을 수 있는 추억들이 쌓이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노을이 질 무렵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롤러스케이트장 위쪽으로 걷다 보니 딸이 좋아하는 초콜릿 숍이 보였다. 아이는 이미 환해진 표정으로 가게 안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초콜릿과 쿠키를 조금씩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자릴 잡는가 싶더니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 하든, 안 하든, 무엇을 선택했든, 안 했든, 어떠한 방향으로든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


이틀 동안 방 별로 열심히 청소를 했다. 빌려 쓴 집은 원상태로 돌려줘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빌려 쓴 침대보와 이불은 아래층 단골 세탁소에 맡겼다. 중국 여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세탁비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현금만 받았다. 

이번에도 침대보와 이불을 가지고 갔더니 $50을 달랬다. 내가 너무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그 여인은 너무 많으냐며 $45는 어떠냐고 물었다. 난 여전히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오케이, 마지막 제안이다(final offer). 네가 결정해라. $40 할래, $35 할래?'라고. 난 당연히 $35라고 대답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우린 서로 웃으면서 딜을 마무리 지었다.

집 청소를 마치고, 짐을 다 싸고, 세탁 영수증은 테이블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록펠러 센터에서 사 온 쿠키를 한 통 냉장고에 넣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집주인이 마음에 들었던 것도 한 몫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부엌에 갔던 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를 불러댔다. 너무 놀라서 뛰어가 보니 내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가끔 날기도 했던 것 같다. 역시 미국은 바퀴벌레도 스케일이 다른가 보구나! 너무 무서웠지만 이대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파리채와 봉지 하나를 들고 다가갔다. 딸이 말했다. '엄마, 내가 동영상 찍어줄게. 잘 잡아봐.' 뒤돌아 보니 딸이 핸드폰을 들고 날 찍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 계획은 파리채로 벌레를 몰아서 봉지 안에 가두는 것이었다. 죽일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리저리 벌레와 사투를 벌이다 결국 한쪽 구석에 있던 바구니 속으로 몰아서 가두어 버렸다. 우린 그제야 마음 편히 자러 갈 수 있었다. 





한국행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선배는 아침 일찍 우리를 데리러 왔다. 차에 짐을 싣고, 난 집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서 집주인에게 보내주었다. 사진과 영상을 확인한 집주인은 보증금을 바로 보내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제 가두어 둔 바퀴벌레만 빼고. 난 선배에게 어제 가둬둔 바퀴벌레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구니를 집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열었다. 여전히 바퀴벌레는 살아있었다. 순간 깜짝 놀라던 선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역시 저 정도 크기면 누구나 놀랄만하지. 선배는 투덜거리며 벌레를 처리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선배가 주차를 하는 동안 우린 비행 수속을 마쳤다. 오랜만에 긴장이 풀렸다. 우리나라 승무원이 있는 우리나라 비행기를 탄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 것 같았다. 선배와 어색한 작별인사를 했다. 그저 기약 없는 만남을 전재로 공허한 공기를 채워보려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고마웠다.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그렇게 각자의 길로 향했다. 


검색대를 통과해 보니 비행기가 딜레이 되어 우리에겐 여유 시간이 좀 생겼다. 일단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공항을 둘러보았다. 선배의 말대로 JFK공항 면세점은 아주 작고 볼만한 것이 없었다.

곧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다. 이제 진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여러 감정이 몰려왔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정말 내가 죽기 전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다시 오면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동안 고마웠다. 안녕, 뉴욕!'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후, 뉴욕 집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쿠키 감사하다고! 그리고 집이 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졌다고! 뿌듯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살면서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를 잘 한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고, 이를 가벼이 넘기지 않고 감사 인사를 해 준 그녀에게 고마웠다. 아직 세상은 아름답구나...!


현재 나의 일상은 뉴욕으로 떠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다. 다만 걷는 것만은 유지하려고 워킹머신을 하나 구입했다. 여긴 뉴욕과는 달리 한가로운 공원도 없고, 생계를 위한 사투밖에 없지만 건강해진 관절과 근육은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아진 건 관절뿐만이 아니었다. 어깨 충돌 증후군으로 몇 년째 오른팔을 올리지도 못했던 내가 지금은 등짝까지 긁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있다.

그것뿐인가. 원인 모를 편두통으로 몇 년째 고생하고 있었는데 뉴욕 이후론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뉴욕이 나에겐 만병통치약이 아니던가. 어쩌면 뉴욕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정답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나에게 뉴욕은 '한 여름의 꿈'이 되었고, 동시에 반 백 살에 머물다 간 '쉼표'가 되었다.

언젠가 뉴욕 선배가 내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좀 행복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 거니?'

난 대답했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야. 소소하지만 기쁜 순간들을 모으다 보면, 결국엔 그게 다 모여서 행복한 삶이 되는 거라고.'


매일 아침 공원에서 새들과 빵 한 조각을 나누면서 일상의 기쁨을 느꼈다.

얼마만큼의 거리인지도 모르는 채, 오랜 시간 걸으면서 성취감이란 벅찬 땀을 흘렸다.

새벽녘 안개가 가득한 해변에서, 보이지도 않는 일출을 기다리며 희망찰 오늘을 꿈꾸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미소로 긍정의 힘을 나누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면서 좋은 마무리란 뿌듯함을 알게 되었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긍정적인 마음에서 오는 소소한 기쁨들.

너무 애쓰지 말자, 결국엔 모두 행복하려고 사는 거잖아.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진 모르겠지만 또 다른 여행을 꿈꾸어 본다.

이제야 깨달았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사과나무를 왜 심어야 하는지를.


행복하자!





뉴욕 여행기를 마치며


처음 이 글을 쓸 땐, 필요한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작했다.

그냥 지식이나 정보를 나열하고, 협찬과 광고로 도배된, 재미없는 관광책자가 아닌, 실제 부딪히는 일상을 공유하면서, 뻔한 듯 뻔하지 않은 뉴욕 여행의 노하우가 되고 싶었다.

매우 개인적이지만 너무 주관적이지도 않은...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게 된 건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간들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몰입하며, 웃거나 울거나가 반복되는...

아마도 뉴욕을 한참 동안 못 잊게 될 것 같다.

뉴욕이 그만큼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소소한 경험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와서이다.


언젠가 희미해질 나의 기억은 이렇게 글로써 각인이 되어 영원한 추억으로 남게 되겠지.

그리고 그 추억들은 쌓이고 또 쌓이겠지...

그래서 이 글은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맺고 싶다.


......



여기까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참고로 번외 편 '플로리다'는 뒤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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