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 나이가 반 백 살에 접어들었다.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나이...... 결국 나 또한 세월의 부속물일 뿐인 것을...... 삐그덕 거리는 관절들과 흘러내리는 살들은 이를 더욱 확인시켜 주고 있었고, 쌓여만 가는 약상자들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구박받던 자식이 효도한다고 했던가. 난 그런 자식이었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난 집 안의 작은 심부름꾼이자, 모두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특히 성격이 매우 예민하고 포악했던 아버지는 내게 항상 두려운 존재였고, 아직까지도 뼛속 깊숙이 침투해 있는 내 노예근성은 날 순탄치 않은 삶으로 이끌고 있었다. 이런 걸 요즘말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했던가? 아버지가 늙고 병들었을 때,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건 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장장 22년을 부양했다. 같이 살진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또는 각종 사건과 사고 등 아버지를 대신해서 풀어야 할 일들이 나에겐 너무나 많았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모든 짐을 내게 떠 넘긴 가족들이 원망스러웠고, 나약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랬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극단적 선택을 하셨다. 나의 22년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왜'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아팠다. 그분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너무나 아파왔다. 하지만 나에게 위로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부짖는 나에게 돌아온 한 마디는 '꼴랑 그거 했다고 유세 떠냐.'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게 모두에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난 생각을 좀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고생하는 나에게 휴식을 주신 거야......'라고. 그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돈이라 생각하고 대신에 저축을 시작했다. 아버지 생전엔 생활비와 병원비등으로 항상 마이너스였던 내 통장에 이젠 돈이 모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3년,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어지면서 어느 날 오른쪽 안면근육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강하다는 진통제란 진통제는 다 사용해 봤지만 듣지를 않았다. 삼차신경통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정밀검사 결과, 원인과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단골 병명인 오래 묵은 스트레스라는 것 외엔...... 그냥 그렇게 아픔이 잦아들기만을 바라며 버텼던 것 같다. 다행히 얼마 후 통증은 잦아들었다. 역시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건가.
난 어느새 50세를 맞았고, 이제는 좀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담소를 나누었다. 어릴 적부터 많은 것을 함께 해왔고, 내 속을 이해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내가 말했다. '나 요즘 성격이 많이 못돼졌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친구야, 그건 네가 못돼지는 게 아니야. 오롯이 네가 너로 살기 위해서 그걸 방해하는 외부요인들을 차단하는 거지.'
난 친구의 말을 듣고 놀랐다. 어쩜 이렇게 함축적이고 논리적으로 말을 할 수가 있지? 명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또 말했다. '나 미국 여행 다녀올까 해. 가서 모은 돈 다 쓰고 오려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실컷 놀다 와!'
내 가슴 한쪽이 찡하게 아려왔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었던가......
친구의 속 깊은 위로가 내게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고맙다, 친구야.
그렇게 나의 여행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어릴 적, 대학 졸업을 기념으로 배낭 하나 매고, 미국 서부 쪽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땐 젊음이란 무기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든 평평한 곳은 침대가 되었고, 사발면은 진수성찬이었으며 몇 마일을 걸어도 끄떡없었다. 그저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좋았고, 내게 그 이상의 보상과 치유는 없던 시절이었다.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이번엔 미국의 동부를 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고 힘들겠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 나의 쉼표는 뉴욕이 될 것이라고.
혼자만 가긴 좀 뭐해서 딸아이를 명분 삼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마침 방학을 앞두고 있어서 견문도 넓힐 겸 영어도 배우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뉴욕에 있는 동안 슬쩍 아랫동네에도 가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디즈니도 50주년이라던데 왠지 동갑인 나와 잘 맞을 것 같았다. 멍하고 흐리던 내 두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두뇌는 버퍼링을 멈추고 빠르게 회전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실컷 놀아봐야지! 이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을지도 모르는 시점, 바뀐 거라곤 나이라는 숫자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오랜만에 솟아오르는 호기를 느꼈다.
난 여행 전문가도 아니고, 여행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인생 50주년 기념으로 미국 여행을 가게 된, 평범한 여자 사람 일 뿐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불안함도 동반한다. '과연 혼자서 잘해 낼 수 있을까.', '아프면 어떡하지?', '괴한이라도 만나면?' 등등. 모두가 말렸다. 미국은 위험하고, 코로나도 극성이고. 경제도 최악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날 멈추게 할 핑계는 되지 못했다. 어차피 인생은 도전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하고, 용기를 갖는 것뿐이었다.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던가. 걱정이 나를 지배하게 하는 순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한 것은 가이드 책을 사는 것이었다. 최대한 세세하게 그려진 지도와 함께. 숙소를 찾으면서 주소와 지도를 비교하다 보니 자연히 지역과 위치 등은 익히게 되었다. 하지만 뉴욕 여행이 끝날 때까지 가이드 책은 한두 번 정도 참고를 했을 뿐, 거의 볼 일이 없었다. 오히려 경험담을 풀어놓은 블로그나 검색을 통한 지식에서 더 많은 현실적인 조언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다른 여행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주고 싶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물론, 이 글이 정답을 제시해 주거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다만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소소한 경험들을 공유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크게는 나 자신을 위해 쓰려고 한다. 점점 늙어서 도태되어 가는 내 기억을 붙잡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