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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Mar 15. 2018

인류문명, 그리고 어쩌다 맥주

"자연과 인간의 위대한 컬래버레이션"

인간의 삶은 원래 처절했다. 인간에게는 사자의 이빨도, 코끼리의 거대한 몸뚱이도 없었다. 새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며 말처럼 빠르게 달리지도 못했다. 유일한 무기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 하지만 인류를 위대하게 만든 문명의 열쇠는 도구가 아니었다. 


도전과 반전 속 태어난 문명


메소포타미아, 인류 문명의 탄생지는 척박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옥한 토양이 드러났다. 인류는 이곳에서 밀과 보리를 얻고자 했지만 자연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본능은 척박함 속에서 꿈틀거렸다. 수메르(Sumer)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두려움에 맞서며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 

메소포타미아((Credit : By Goran tek-en, wikipedia)

자연은 평화로움과 부유함만을 건네지 않았다. 불규칙한 홍수는 농경 생활을 막 시작한 수메르인들에게 고통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범람하는 강물을 막기 위해 관계시설을 구축하고 댐을 건설했다. 치수사업은 자연스럽게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까지 발전시켰다. 


정교한 배를 만들 수 있었던 수메르인들은 강을 통해 활발한 교역을 전개했다. 무역은 메소포타미아에 도시가 들어서는 초석이 됐다. 농산물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문자도 태어났다. 문자는 문명과 선사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기원전 5200년 경 수메르는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인류 최초의 도시국가가 된다.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문명이라는 반전을 가져다준 셈이다.

 

빵, 맥주가 되다


애초 최초의 술은 과일 발효주였다. 과일에 남아있던 당에서 발효된 액체는 문명 이전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건 획득물에 불과했다. 맥주는 달랐다. 과실주와 달리 빵에서 태어난 맥주는 반드시 농업, 즉 문명 속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음료였다. 


풍부한 강수량으로 쌀농사가 발전했던 동아시아와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밀과 보리가 주요 곡물이었다. 수메르인들은 건조한 곡물을 빻은 뒤 물로 반죽해 빵으로 구웠다. 이미 불을 이용해 벽돌을 만들었던 수메르인들에게 빵 화덕 정도는 애교였다. 

맥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수메르 문자(Credit : By BabelStone, Wikipedia)

맥주는 빵을 굽고 보관하는 과정에서 나온 우연한 선물이었다. 먹다 남은 빵이나 곡물죽을 항아리에 보관하는 건 당시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보관 중이던 빵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이 스며든 빵 사이로 시큼하고 달달한 액체가 생긴 것이다. 


이 액체를 처음 맛본 사람은 배가 많이 고팠거나 도전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을 테다.  중요한 건, 이 액체가 사람을 죽거나 아프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죽기는커녕 힘이 솟았을 뿐만 아니라 기분도 좋아졌으니 횡재나 다름없었다. 


빵에서 나온 액체가 건강에 문제없다는 걸 깨달은 수메르인은 빵과 물을 섞어 죽으로 바꾼 다음 시원한 곳에 보관했다. 이후는 신의 소관이었다. 인류는 불과 200여 년 전에야 효모와 균이 발효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양조에는 신의 가호가 필요했다. 수메르인들은 힘들게 얻은 마성의 액체에 '시카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맥주가 얻은 최초의 이름이었다.


최초의 맥주 여신, 닌카시(Credit : Smithsonian)

최초의 맥주 신, 닌카시


맛있는 시카루를 만들어주는 신의 이름은 닌카시였다. 수메르인들은 대지와 농사를 관장하는 신을 여자로 생각했는데, 맥주의 신도 그러했다. 빵에서 나온 거친 죽이 닌카시의 손길을 거쳐 시카루가 된다고 믿었다. 수메르의 맥주 신은 이후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관통하는 신화의 기틀이 됐다. 수메르에는 시카루뿐만 아니라 다양한 컬러와 맛을 갖는 맥주들이 있었다. 심지어 다이어트 맥주의 일종인 'eb-la'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시카루를 지금도 마실 수 있다면 어떨까? 흥미롭게도 현존하는 맥주 스타일 중 시카루와 유사한 맥주가 존재한다. 벨기에 람빅(Lambic)이라는 맥주는 놀랍게도 시카루와 많은 부분에서 흡사하다. 50%의 밀과 50%의 보리가 사용되는 이 맥주는 철저하게 자연 속에 있는 효모와 균을 통해 발효를 진행한다. 


현재 90% 이상의 맥주는 인간이 길들인 효모(Culture yeast)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람빅은 자연에 존재하는 야생효모(wild yeast)와 유산균의 일종인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를 통해 양조된다. 이 미생물들은 맥주에 강한 신맛과 쿰쿰한 향을 부여하는데, 아마 시카루 또한 이러한 맛과 향을 가졌을 것이다. 

Cantillon Lambic.(Credit : Beergle)

기원전 3000년 쓰인 '닌카시에 바치는 헌시'를 보면 현재 맥주 양조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외관과 향미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천 년 전 맥주와 현재 맥주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시카루와 카스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맥주는 신이 인간에게 던져준 선물이 아니다. 맥주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처절함에서 나온 산물이다. 맥주에는 수메르인들이 자연과 당당하게 맞섰던 결기가 남아있다. 좋은 시카루를 위해 닌카시에게 기도했던 간절함도 들어있다. 맥주의 생사고락, 그 옆에는 인간의 역사가 있다. 맥주의 역사를 거슬러보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탐닉해 보는 것과 같다. 물론 더 이상 닌카시의 손길을 맥주에서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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