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로 재미있게 노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프롤로그_맥주로 재미있게 노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얼마 전 지인이 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살아남은 자들의 축배’, 한 귀퉁이에는 흐릿하게 그림의 제목이 보였다.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린 중세풍 그림이었다. 코로나로 힘든 이 시기를 잘 넘긴 후 편하게 한 잔 하자는 ‘긍정적인’ 메시지였으리라. 맥주를 사랑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 그림은 분명 뭔가 센티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뭔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페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축배를 마셨을까? 친구와 가족, 우리 공동체가 무너진 후에 단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축배’를 마실 수 있었을까? 저 그림에 있는 술은 축배가 아니고 위안과 연대를 위한 한 잔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을 것만 같은 이런 생각이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끌었다.
맥주가 나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약 12년 전 사업차 갔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였다. 그 흔한 유럽 배낭여행도 못해 본 서울촌놈이 독일에서 마신 첫 맥주가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전까지 맥주는 가끔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는 탄산감 가득한 음료, 아니면 소주에 말아먹는, 흔하고 언제나 살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술이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의 그 맥주는 내가 알던 녀석이 아니었다. 두툼하게 구워진 학센과 함께 마신 바이스비어는 마치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치명적이었다.
궁금했다. 독일에서 마셨던 맥주는 왜 다르게 다가왔을까? 30대 중반, 맥주에 대한 이런 호기심은 나를 이상한 나라로 점점 빠져들게 했다. 아직 한국에 그럴싸한 맥주 서적이 없던 시절, 교보문고의 해외서적 주문 코너와 애플의 아이북스에서 구입한 영문 맥주 책들은 엘리스를 작은 구멍으로 안내하는 흰 토끼들이었다. 허구한 날 맥주를 끼고 사는 남편을 바라보는 와이프의 따가운 눈초리는 이미 초월한 지 오래, 난 인생에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어찌할 줄 몰라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작센하우젠, 하이델베르크의 베터, 쾰른의 비어에셀, 라인가우의 골든키, 뮌헨의 슈나이더바이세, 밤베르크의 슈렝케를라와 크로이츠베르크, 라이프치히의 오네베덴켄, 프라하의 우 즐라테호 티그라,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등 맥주의 역사가 켜켜이 느껴지는 수많은 곳을 방문하며 맛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알코올이 들어간 황금색 액체였지만 한국에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 있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나온 답은 '문화'였다.
맥주는 문화로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 별 거 없을 것만 같은 맥주 이야기에는 수 천년 간 켜켜이 쌓여있는 인간의 욕망, 슬픔, 기쁨이 들어있었다. 자본의 적나라함과 자유와 해방 그리고 반문화와 도전도 함께 있었다. 맥주는 한낱 술이 아니고 우리에게 새로운 지향점을 알려주는 문화였던 것이다.
2015년 상암동에 오픈한 맥주 펍 플라츠는 취미를 현실로 만든 내 인생 최대의 불장난 중 하나였다. 잘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40년 넘은 구옥을 매입해 독일식 맥줏집을 지었다. 내가 꿈꾸던 맥주 아고라였다. 지식이 아닌 현실의 맥주를 마주하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맥주 뒤에 숨겨있는 문화의 힘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지식이 아닌 실존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이러한 경험은 사단법인 한국맥주문화협회와 정동 독립맥주공장을 만든 힘이 되었다. 사단법인 한국맥주문화협회는 맥주는 문화이며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힘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다. 정동에 설립한 독립맥주공장은 도심 속에 있는 작은 브루펍이다. 이곳에서 나는 대표와 양조사로 일하며 크래프트 맥주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술 문화가 일천한 한국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지만 맥주가 우리 공동체에 선한 가치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다.
그렇다. 모두가 맥주로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겠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맥주로 재미있게 노는 것, 조금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새로운 가치는 늘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맥주로 재미있게 놀려면 그 안에 사람과 삶이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면 맥주는 그냥 알코올이 담긴 액체에 불과하다.
알코올과 탄산이 들어있는 아름다운 음료는 나를 상상치 못했던 공간으로 이끌었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 이들과 함께 맥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발칙한 생각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맥주가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브런치가 옆에 있었다. 이 책은 2018년부터 이곳에 끄적인 낙서집이자 지금까지 나를 이 길로 이끈 맥주 이야기다.
새로울 것 없는 우리네 인생이 맥주로 더 풍성했으면 좋겠다. 맥주로 노는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언제나 진보적으로 그러나 유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