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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Nov 13. 2019

맥주 한잔을 들고 있는 당신, 자유롭다.

한잔의 맥주로 자유를 찾아 떠나보자

"마시고 싶어"


식당 한 구석, 점심을 먹고 있는 직장인들 사이에 60대로 보이는 가벼운 옷차림을 한 남자가 조금 난감해보이는 표정으로 한쪽 벽을 바라보고 있다. 벽면에 붙어있는 맥주 광고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그는 어제 정년퇴임한 가스미 타케시 부장이다.  


지금까지 평일 점심시간에 맥주를 마시는 것을 상상도 못해본 그의 앞에 어느새 차가운 갈색병과 투명한 잔이 놓여있다. 직장인들이 북적거리는 평일 점심,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 마음 한쪽에 있던 허탈감은 맥주 한잔으로 사라지고, 이내 새로운 도전 정신이 마음 속에 싹튼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나는 방랑의 미식가가 되기로. 

필스너우르켈 (출처 : 윤한샘)

“나는 자유의 몸이다.”


'방랑의 미식가'라는 일본 드라마의 첫편의 제목은 '한낮의 맥주'이다. 평생 성실하고 소심하게 살던, 막 정년퇴임한 한 남자에게 새로운 도전정신을 심어준 건 다름 아닌 '낮맥'이다. 가스미 다케시 부장이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마시며 자유를 부르짖는 그 순간, 우리 역시 그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낮맥이라고 밤에 마시는 맥주와 다를 바 없을진대, 왜 우리는 '낮맥'에서 '밤맥'과는 달리 자유를 느끼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탄생한다. 농경문화의 발달로 인해 우연히 발견된 맥주는 그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반려자로 수천년간 함께 해왔다. 때로는 식수와 노동주로, 때로는 공동체 의식을 담은 사회적 음료로 신분과 나이 여하에 상관없이 누구나 맥주를 마셨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며 맥주는 유럽을 대표하는 민중의 술이 되었다. 유럽 각 지역에서 시대정신을 담은 맥주가 생사를 반복했고, 그 과정 속에서 맥주는 문화로서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맥주가 문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문화 또한 맥주를 만들었다. 독일 바이에른 밤베르크 지역맥주인 슈렝케를라(Schlenkerla)는 너도밤나무를 태워 만든 몰트로 양조되어 맥주에서 훈연향을 느낄 수 있으며, 고슬라 지역의 짠 강물로 탄생한 고제(Gose)는 라이프치히로 넘어와 짠맛을 지닌 맥주로서 사랑을 받았다. 밤베르크 사람들은 아침부터 슈렝케를라를 레베케제라고 하는 간으로 만든 소세지와 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고제를 마실 때, 민트 등과 같은 허브와 향신료를 맥주에 넣어 자연스럽게 마시곤 한다. 

슈렝케를라 (출처 : 윤한샘)

이들에게 맥주는 밤에만 마시는 술이 아니라 낮에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음료에 가깝다. 유럽에서 낮에 카페나 펍에서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이들에게 낮맥을 한잔 하며 자유의 쾌감을 부르짖는 가스미 다케시 부장의 모습은 호들갑을 떠는,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잘못된 술문화의 사생아


이렇게 같은 맥주이지만 유럽의 낮맥과 아시아의 낮맥은 문화적 맥락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특히 한국 문화에서 맥주는 업무가 끝나고 이어지는 회식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다. 팀장님의 건배사와 함께 다같이 원샷을 때리는 청량한 액체는 배부름을 느끼고 이내 화장실을 부르는 황금빛 악마와 같다. 취함이 곧 화합이라는 산업화 시대 정신에서 그 배부름이 주는 불쾌함은 이내 소주를 부른다. 소맥은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라는 잘못된 술문화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맥주가 회사 공동체의 화합을 위한 단순한 술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낮에 마시는 맥주, 즉 오롯이 나만을 위해 마시는 그 한잔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그제서야 건배사와 함께 다가오던 황금빛 악마가 비로소 황금빛 천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낮맥을 통해 가스미 다케시 부장이 느낀 자유와 해방감에 공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에게 낮맥과 밤맥은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다른 맥주이다.

소맥 (출처 : 위키피디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의 시대를 급격한 산업시대와 겪으며 한국만의 술문화는 단절되었다. 술이 문화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안타깝게도 단절의 간극이 큰 만큼 예전의 전통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제도가 아닌, 문화이기 때문이다. 문화란 그 시대의 정신과 관습이 성장하고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가치이기에 지금의 술문화는 반세기 동안 우리사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최근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 생겨나고 있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는 20~30년 전만해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였다.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폭력적인 술문화가 남아있지만 나이와 직책에서 오는 위계가 희석되고 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을 배려하는 사회적 가치들이 조금씩 술문화에도 반영되고 있다. 



맥주, 올바른 술문화의 시작


이러한 맥락에서 맥주는 새로운 한국 술문화의 변화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페일라거(pale lager)가 지배하던 시장에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맥주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새롭고 창의적인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까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맥주들이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맥주는 합의, 존중, 개성, 다양성과 같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들에 부합하는 음료로서 새로운 술문화를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헤디토퍼 (출처 : 윤한샘)

시원하고 청량감 가득한 라거든, 바나나 향이 물씬 묻어나는 바이스비어든, 짜릿한 신맛이 침샘을 폭발시키는 람빅이든, 아니면 브루어의 개성이 넘쳐 흐르는 크래프트 맥주든, 어느 맥주를 선택하건 개인의 선택이다. 다양성과 개성 존중은 자유와 소통을 만든다. 소통에 목마른 부장님과 팀장님이 삼겹살집이 아닌 크래프트 맥주 펍에 자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맥주는 그 시대 대중들의 문화를 담아온 술이다. 우리는 맥주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맥주가 문화인 이유이다. 맥주를 단순히 술로 바라보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알콜 담은 액체에 불과하다. 맥주를 문화로 이해하고 그 가치를 파악하여 그 시대정신에 맞는 술문화를 만드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가스미 다케시 부장이 낮맥 한잔에 느끼는 자유로움에 더 이상 공감하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 낮과 밤이 아닌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그 맥주가 당신은 이미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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