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홀로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
지금까지 이런 12월은 없었다. 이맘때 익숙했던 송년회와 크고 작은 모임들이 사라졌다. 밤거리를 수놓던 화려한 불빛과 음악들 그리고 맛있는 냄새와 살가운 사람의 온기도 찾기 힘들다. 누구의 잘 못도 아니다. 그냥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일 뿐. 크리스마스 캐럴과 보신각 타종, 우리가 일 년을 마무리하며 기대했던 것들이 올해는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사라질 듯하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추억의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혼자 보내야 하는 크리스마스. 아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홀로 크리스마스, 아마 이런 크리스마스는 앞으로 없을 것 같다. 없어 보이지만 의미 있는 홀로 크리스마스다. 더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나쁜 바이러스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기력하게 보낸다면 인류의 자존심에 더 큰 스크래치가 생길 수 있다.
팬더믹 시대, 행복한 ‘홀로 크리스마스’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작은 등불 또는 촛불이 있으면 좋겠다. 좋은 음악도 빠질 수 없다. 혼자 궁상떠는 게 싫으면 랜선 모임을 위한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도 챙겨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맥주가 있다면 완벽할 것이다.
왜 맥주인지를 물어보신다면 답은 수 백가지지만, 정답은 단순하다. 맥주는 행복과 고난의 시절과 상관없이 항상 우리 곁에 있어준 술이니까. 크리스마스를 위해 존재하는 맥주들이 있다. 일명 크리스마스 에일이라고 불리는 이 스타일은 특별히 이 시즌을 위해 양조된 맥주들이다. 라벨에는 어김없이 하얀 눈과 작은 집, 산타클로스와 작은 트리를 담겨 있다. 8~10% 알코올, 시나몬 향, 기품 있는 단맛과 바디감은 즐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한 해를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크리스마스 에일이 만드는 온기를 오롯이 느끼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면 망설임 없이 다양하고 개성 있는 크리스마스 에일을 소개하련만, 올해는 혼자 보내야 하는 크리스마스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마시는 맥주들은 팬더믹에 지친 우리를 더 행복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더 특별하고 예외적인 맥주여야 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함께 할 주전부리도 있으면 좋겠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그 조합을 우리 사회 공동체의 편익과 행복을 위해 발설한다.
진한 허쉬 초콜렛 음료와 바사삭한 시나몬 쿠키, 입안에 살짝 남아있는 캬라멜, 이 모든 것을 맥주 한 모금에서 느낄 수 있다면 기꺼이 혼자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으리라.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검정색 맥주를 기깔나게 만드는 하디우드 브루어리의 크리스마스 모닝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이브를 위한 맥주다. 묵직한 다크 초콜렛 향과 뭉근한 단맛은 쌉쌀한 쓴맛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마치 70% 다크 초콜렛을 마시는 것 같다. 혀에 잠시 머문 이 검은 액체는 미끄러지듯 목으로 넘어가며 캐러맬과 시나몬 향을 터트리고 방금 구운 쿠키 향과 함께 비강과 목을 가득 채운다. 이건 액체로 빙의된 초콜렛 시나몬 쿠키다.
9% 알코올은 한 잔을 하더라도 기분 좋은 임계치를 만든다. 하지만 홀로 크리스마스에 한 잔은 부족하다. 두 잔은 자칫 질릴 수도 있지만 이 치명적인 리스크는 ‘투게더’와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투게더’ 한 스쿱을 맥주잔에 넣고 크리스마스 모닝을 주위에 살살 뿌리면, 최상급 맥주 아포카도가 완성된다.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라면 올해 크리스마스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맥주는 행복한 홀로 크리스마스를 위해 태어났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지만 케잌을 생략하는 것은 유죄다. 초코 크림 위에 딸기와 베리가 수북이 올려져 있는 크리스마스 케잌은 상상만으로도 말초 신경을 행복하게 자극한다. 하지만 홀케잌은 과하고 조각 케잌은 뭔가 아쉽다. 이 오류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맥주 세계로 눈을 돌려 보면.
스웨덴 집시 브루어리인 옴니폴로의 플래시백은 옹골차다. 9% 알코올을 가지고 있는 이 임페리얼 포터는 달달한 메이플 시럽을 흠뻑 적신 블루베리 케잌이다. 보랏빛이 살짝 도는 다크 브라운 색, 찐득하고 부드러운 촉감, 코 끝을 치고 가는 블루베리 향은 잔에 담긴 우아한 케잌을 연상하게 한다. 한 모금 머금으니 메이플 시럽의 달콤함과 상큼한 블루베리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이어 살짝 묻어 나오는 캬라멜과 쿠키의 고소함은 씹어 먹고픈 욕망을 부추긴다. 9% 알코올은 낌새도 없다. 시럽처럼 묵직하지만 매끈하게 넘어간다. 홀로 크리스마스를 아름다운 밤으로 바꾸는 마법이다.
한 모금을 한 조각의 초코 블루베리 케잌처럼 즐길 수 있기에 맥주 만으로도 멋진 밤을 보낼 수 있지만, 만약 여전히 불행하다 느껴진다면 초콜렛 무스 케잌를 곁들이기를.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달(콤)달(콤)’ 조합이 세포 속의 행복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킬 것이다. 이 조합으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전문의와 상담을 받을 것.
맥주에서 가장 흔한 클리쉐는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깜장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크리스마스가 다채롭 듯이 크리스마스 맥주도 다양할 수 있다. 독일 바이헨슈테판과 미국 사무엘 아담스가 콜라보레이션 한 인피니움은 폭발적인 탄산을 품고 있는 황금색 샴페인 맥주다.
서양배, 진득한 붉은 사과, 향기로운 모과 향이 뭉근히 입 안을 물들이는 가운데 꿀 향과 건초 향이 스치 듯 지나간다. 밝은 황금색과 터질 듯 한 탄산에 홀리지 말자. 샴페인이나 까바가 아닌 맥주다. 10% 알코올과 농밀한 단맛에 맞서는 쓴맛이 존재한다. 이 둘이 만드는 밸런스는 인피니움이 가진 모든 향을 자연스럽게 흩날린다.
이 사랑스러운 맥주에는 하얀색 브리 치즈를 곁들이자. 부드러운 브리 치즈와 인피니움을 함께 씹고 있자면 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꿀과 과일 향은 브리 치즈 속살까지 파고들며 조밀한 탄산은 쫀득한 치즈를 결결이 나눠 입안에서 춤추게 한다. 말 그대로 무한 흡입 각이다. 병 마저 트리를 닮았으니 아름다운 홀로 크리스마스를 위한 종합 선물 세트라 할 수 있다.
케빈은 올해도 나 홀로 집에 있을까? 크리스마스 밤을 거뜬히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영화다. 케빈은 올해도 어김없이 티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올해는 아이패드처럼 나만의 스크린을 준비하는 건 어떨까. 넷플릭스 아이디가 있다면 금상첨화. 이렇게 크리스마스 밤을 지새울 영화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맥주와 주전부리가 필요하다.
크리스마스를 영화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당신에게 필요한 맥주는 에딩거 둔켈 바이스비어다. 독일 바이에른에서 온 이 어두운 색 밀맥주는 고혹적이다. 빨려 들어갈 듯 한 짙은 고동색과 왕관처럼 솟아오르는 아이보리 색 거품은 크리스마스 밤과 어울린다. 섬세한 초콜릿과 커피 향, 옅은 쓴맛과 조밀한 탄산은 편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5.3% 알코올과 부드러운 바디감은 영화를 보는 당신을 부담스럽지 않게 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데 주전부리가 빠지면 섭하다. 입도 심심하지 않고 배도 부르지 않은 맥주 주전부리로 땅콩 만한 게 없다. 그중 커피 땅콩은 에딩거 둔켈 바이스비어와 영혼의 단짝이다. 땅콩에 코팅된 커피 향이 맥주의 커피 향과 만나 짝꿍이 된다. 혀 위의 달달함은 쓴맛과 탄산에 휩싸여 사르르 녹아든다. 에딩거 둔켈과 함께라면 커피 땅콩을 영원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관 콜라와 팝콘은 감히 비교할 수 없다. 30년째 늙지 않는 케빈을 기꺼이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 있으니 주의 바람.
검붉은 색, 농밀한 체리와 붉은 자두 향 그리고 짜르르 울리는 신맛, 플란더스 레드에 일인 로덴바흐 그랑크뤼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한껏 품은 맥주다. 이 맥주의 색은 크리스마스 색 그 자체다. 영롱한 붉은색은 매혹적이다. 비강을 물들이는 체리 향은 밝고 상큼하며 뒤를 받치는 단맛은 입안을 자극하는 신맛과 균형을 이룬다. 마치 잘 익은 붉은 과일들을 한 움큼 마시는 느낌.
로덴바흐 그랑크뤼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혼자만의 크리스마스를 기품 있게 띄워주는 분위기 메이커다. 트리 장식과 조명 아래 이 맥주를 들고 있으면 꿈꾸던 크리스마스이브가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라즈베리 무스 케잌은 로덴바흐 그랑크뤼의 화룡점정. 레드 계열의 베리 향과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은 맥주와 하나가 된다. 맥주의 짜르르한 신맛이 라즈베리 무스와 만나 기품 있는 산미로 바뀌면 로덴바흐 그랑크뤼는 5% 알코올을 머금은 체리 주스로 변한다. 이제서야 빨강은 진짜 크리스마스 색이 된다.
슬프지만 모든 것을 잠시 멈춰야 하는 시점이다.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랜선으로 함께 할 수 기술도 있고 설레는 마음으로 구매할 수 있는 맥주도 있다. 우리의 기분과 개성, 취향에 맞는 다양한 맥주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그 맥주로 인해 이 엄혹한 시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어 감사하다. 우리는 그저 맥주를 즐기며 행복 회로를 돌리면 된다. 분명 지금 함께 한 맥주를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실 수 있을 테니. 2020년 홀로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