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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Jan 10. 2020

맥주 가라사대, 태초에 밀이 있었느니라

독일 바이에른 밀맥주, 바이스비어(weissbier)

태초의 맥주, 밀맥주


맥주의 기본 재료는 보리몰트, 홉, 효모 그리고 물이다. 보리가 맥주 양조에 주로 사용되는 이유는 풍부한 전분과 두터운 껍질 그리고 당화효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들은 당을 추출하고 발효를 하는데 다른 곡물보다 더 높은 수율을 보장한다. 하지만 보리와 함께 태초부터 맥주에 사용된 중요한 곡물이 있다. 바로 밀이다.


 1만년  맥주가 처음 만들어졌을 , 야생 밀과 보리가 함께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은 농경생활을 통해 수확한 보리와 밀로 빵을 만들었고, 맥주는 물이 섞인 빵에서 우연히 발효되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 뿐만 아니라 또다른 문명 발생지인 이집트에서도 밀과 보리가 맥주에 사용된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34년 바이에른 쿨름바흐(Kulmbach)의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 가운데 어두운 밀(dark wheat)로 만든 맥주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밀이 들어간 맥주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맥주 (출처 : 윤한샘) @대영박물관
메소포타미아 밀과 보리 (출처 : 윤한샘) @대영박물관

지금은 대다수의 맥주에 보리가 가장 핵심적인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밀이 주인공인 맥주들도 있다. 람빅(lambic), 벨지안 윗(Belgian wit), 베를리너 바이세(Berliner weisse), 바이스비어(Weissbier) 같은 밀이 들어간 맥주들이다.


이 중, 바이스비어는 독일 맥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맥주 시장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맥주 스타일 중 하나이다. 먼저 바이스비어라는 명칭부터 정리해보자.


바이스비어(Weissbier),  바이세(Weisse) 그리고 바이젠비어(Weizenbier)


독일 바이에른 지역의 밀맥주는 크게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바이스비어, 바이세 그리고 바이젠비어다. 바이스비어(Weissbier)에서 바이스(weiss)는 독일어로 ‘흰색’을 의미한다. 이는 17세기 이전, 모든 맥주가 어두운 색이었던 것에 반해, 밀이 다량으로 들어간 맥주는 상대적으로 밝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이세(Weisse)는 바이스의 여성명사로서 역시 같은 뜻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바이젠(Weizen)은 밀(Wheat)을 의미하며 바이젠비어 또는 바이젠은 말 그대로 밀맥주를 뜻하고 있다.


바이스비어는 현재 가장 대중적인 맥주 중 하나며 수많은 서브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위상을 갖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독일 바이에른을 대표하는 전통 밀맥주인 바이스비어, 이 맥주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까?   


맥주순수령 그리고 바이스비어


우리가 현재 즐기는 바이스비어 스타일의 원산지는 독일과 체코다. 12~13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던 독일 바이에른과 체코의 경계를 중심으로 밀맥주가 발달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바이스비어의 잠재성과 매력을 꿰뚫고 있던 가문이 있었으니, 1180년~1918년까지 바이에른 공국을 지배한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이다.


비텔스바흐 가문 문양(출처 : 위키피디아)


1269년, 가문의 4번째 백작인 루드비히(Ludwig) 백작은 뮌헨에 첫 번째 브루어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에 이 지역은 맥주보다는 와인을 더 많이 양조했고 선호했다. 과거 로마령의 핵심지역으로 오랫동안 와인을 만들어왔고 게다가 포도를 키우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이 지역의 맥주양조 기술은 빈약했고 가짜 맥주나 낮은 품질의 맥주가 빈번하게 판매됐다.


16세기 이전 뮌헨에서 만들어지는 맥주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맥주의 맛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시체의 일부분이나 이상한 약초를 넣기도 했고 양을 속이는 일이 잦았다. 독초를 넣은 맥주를 마셔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낮은 품질의 맥주를 만드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맥주 품질로 사회가 피해를 입자 일종의 식품품질관리법이 제정된다. 이것이 바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이다. 1516년, 빌헬름 4세(Wilhelm IV)는 맥주의 품질 향상을 위해 '보리' '물' '홉', 세 가지 재료로만 맥주를 만들라고 공포했다. 또한 맥주 판매 용량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법률의 형식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맥주 재료와 양을 속이지 말라는 호소에 가까웠다.

맥주순수령 (출처 : 구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맥주순수령 속에 밀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밀은 맥주를 만드는데 사용하면 안 되는 재료였다. 하지만 맥주순수령 제정 후에도 여전히 밀은 맥주를 양조하는데 사용됐고 이에 대한 제재도 없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른 재료와 달리 밀은 태초부터 사용된 곡물로서 그 순수성을 인정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한다. 밀은 맥주에 들어가도 특별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은 재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사실 이때까지 바이에른의 영주는 맥주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빌헬름 4세가 맥주순수령을 공포하긴 했으나, 그는 양조기술은 물론 맥주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데겐베르거‘ 라는 가문이 등장하며 또렷해진다.   


1520년, 데겐베르거(Degenberger) 가문은 바이에른 영주에게 밀맥주에 대한 '생산 독점권'(Weissbierregal)을 요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밀맥주 독점생산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빌헬름 4세는 이들에게 선뜻 이 독점권을 허락했다. 만약 빌헬름 4세가 맥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생산독점을 허가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1553년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가 영주가 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맥주순수령 제정 이후 바이에른 지역의 맥주 품질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고, 게다가 생산 독점권을 가진 데겐베르거는 좋은 품질의 밀맥주를 만들어 높은 수익을 얻고 있었다.  


당시 남부 독일, 즉 바이에른은 시민계급이 발달한 북독일과는 달리 영주의 입김이 거의 절대적인 곳이었다. 사실 맥주순수령이라는 법령이 잘 먹혔던 이유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데겐베르거 가문이 밀맥주 독점으로 큰 수익을 벌어들이자,  알브레히트 5세는 이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밀맥주에 큰 세금을 부과하고 독점권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데겐베르거 집안의 대표인 '한스 지그문트'는 이러한 영주의 지시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1602년 그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이 갈등은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알브레이트 5세는 '밀맥주 양조권'을 회수하고 독점적 생산을 통해 수익을 얻게 된다.


빌헬름 5세, 바이에른 맥주의 토대를 닦다


알브레히트 5세의 아들인 빌헬름 5세(Wilhelm V)는 이전 영주들과 달리 맥주를 좋아했다. 바이에른 맥주 품질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당시 최고 수준의 맥주를 만들던 아인베크(Einbeck)에서 많은 돈을 들여 맥주를 수입해서 마시곤 했다.


빌헬름 5세는 뮌헨에서도 아인베크와 같이 훌륭한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맥주 수입에 들어가는 지출도 부담이었다. 결국 1589년 뮌헨에 호프브로이(Hofbrau)라는 양조장을 만들게 된다. 가장 유명한 비어홀이자 여전히 바이에른 주정부 소속의 양조장인 호프브로이 하우스(Hofbrauhaus)는 이렇게 탄생했다.


호프브로이에 대한 영주의 사인 (출처 : 윤한샘) @호프브로이하우스


하지만 곧 독일 전역을 황폐화시킨 재앙이 시작되었다. 바로 '30년 전쟁'(1618년~1648년)이다.


30년 전쟁과 막시밀리언 I세, 바이스비어의 전성기를 열다.


신교도와 구교도의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종말에는 유럽의 국가 간 전쟁으로 확대된다. 17세기 세계대전과 같았던 이 전쟁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인구의 반 이상이 사망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의 영주는 빌헬름 5세의 아들 '막시밀리언 1세'(Maximilian I)였다. 맥주의 기초를 다진 것은 그의 아버지지만, 바이에른의 맥주 위상을 격상시키고 발전시킨 사람은 막시밀리언 1세였다. 그는 30년 전쟁 동안 바이에른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안정적인 성장의 기틀을 만든 인물이다. 또한 지금의 바이에른 맥주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리더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버지인 빌헬름 5세와 마찬가지로 맥주를 사랑했다. 아인베크 지역의 브루마스터를 호프브로이 하우스로 스카웃하여 바이에른 맥주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으며 켈하임(Kelheim) 지역에 양조장을 추가로 건설해 밀맥주를 바이에른의 대표 맥주로 만들었다.


밀맥주 독점 판매 이익은 바이에른이 30년 전쟁을 버티게 군자금과 같았다. 막시밀리언 I세는 밀맥주를 통해 전쟁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후 황제군을 도운 공로로 '선제후'의 자격까지 받게 된다.


'30년 전쟁' 이후의 신성로마제국은 껍데기와 같았지만 바이에른은 이를 계기로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까지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위치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바이에른 법이었던 맥주 순수령도 독일 제국 성립 시, 민족 정체성 제고라는 미명 하에 제국법으로 격상되었다.


이 뒤에는 모두 바이스비어라는 밀맥주가 있었다.


막시밀리언 1세 (출처 : 위키디피아)


아이러니하게 30년 전쟁은 바이에른이 맥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더 이상 포도 재배가 힘들게 되자, 사람들은 와인이 아닌 맥주양조에 집중을 했다. 자연스럽게 바이에른은 20세기 독일 맥주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밀맥주가 그동안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바이에른의 정치적 위상을 격상시키고 독일 맥주산업의 중심이 되는데 암묵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바이스비어의 ‘생각치도 않은’ 몰락


1602년 비텔스바흐 가문이 독점했던 바이스비어 양조권은 약 200여년 뒤인 1798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19세기부터 '바이스비어'에 대한 인기는 점점 하락하게 된다. 바로 필스너 우르켈을 위시한 페일 라거(pale lager)의 성장 때문이었다. 페일 라거는 19세기부터 2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체제와 산업자본의 성장 그리고 냉장기술의 발달을 등에 업고 세계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트렌드였던 라거는 당시 최고의 맥주였던 영국의 에일도 한방에 무너뜨렸으며, 독일의 맥주 시장도 변화시켰다. 특히 바이에른 출신인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는 라거 맥주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바이에른 전통 맥주인 밀맥주의 몰락을 주도했다.  


1876년 칼 폰 린데가 냉장고가 발명한 후, 라거는 매우 짧은 시간에 대중의 기호를 사로잡는 맥주로 성장했다. 라거의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된 이후, 경쟁력이 떨어지는 지역 맥주들은 사라지거나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때 시대를 호령했던 밀맥주도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당시 바이에른 영주였던 루트비히 2세(Ludwig II)는 결국 수익성이 떨어진 밀맥주 독점 양조권을 포기하고 판매하기로 했지만 실패했다. 누구도 밀맥주를 만들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프브로이 하우스조차 밀맥주를 포기하고 라거 맥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이에른을 대표하던 밀맥주는 이렇게 한 순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슈나이더바이세(Schneider Weisse) 그리고 에딩거(Erdinger)


슈나이더 바이세


슈나이더바이세(출처 : 위키디피아)


1872년 인기가 사라진 바이스비어의 끈을 잡은 한 인물이 등장한다. 게오르그 슈나이더(Georg Schneider)라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아들은 루트비히 2세로 부터 바이스비어 양조권을 구입하고 뮌헨의 버려진 양조장인 Zum Maderbrau를 인수했다. 그는 바이에른 전통맥주인 바이스비어의 명맥이 이어지기 바라며 묵묵히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슈나이더 바이세는 1872년 게오르그 슈나이더와 그의 아들이 세운 바이스비어 양조장이다. ‘마인 오리지널 바이세, 탭7’(Mein Original Weisse Tap7’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150여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부서진 뮌헨의 양조장에서 1928년 켈하임으로 거점을 옮긴 후 지금까지 바이스비어 한 스타일만 만들어오고 있는 슈나이더 바이세는 전통적인 바이스비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타일의 밀맥주를 만들고 있다.


슈나이더 바이세는 숫자로 맥주 스타일을 나누고 있는데, 무려 탭(tap)1부터 탭11까지 11종 이상의 바이스비어를 갖고 있다. 이 속에는 전통적인 스타일 뿐만 아니라 아이스복 바이젠과 미국 홉을 사용한 크래프트 스타일의 탭X까지 다양한 바이스비어가 존재한다. 설립부터 기치로 내걸었던 바이스비어 스페셜리스트라는 가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은 맥주 역사에 많은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에딩거


에딩거 (출처 : 비어케이)


1886년 뮌헨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 에딩(Erding)에서 작지만 위대한 움직임이 꿈틀되고 있었다. 에딩의 몇몇 브루어들이 바이스비어의 전통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첫 담금을 시작한 것이다.


에딩의 작은 바이스비어 양조장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프란츠 브롬바흐(Franz Brombach)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에딩의 바이스비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1935년 이 양조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2차 대전의 포화가 끝난 1949년 에딩거 브로이하우스(Erdinger brauhaus)라는 정식 명칭으로 본격적인 바이스비어 생산에 들어갔다.


에딩거는 바이스비어를 일반인들도 쉽게 접하고 즐기길 원했다. 바이스비어의 대중화를 위해 지속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1960년에는 독일 전 지역으로 유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이런 끊임없는 투자는 135년 전 에딩이라는 마을에서 시작된 작은 희망을 현재 세계 100여개 국가에서 즐기는 맥주로 성장시켰다. 여전히 에딩거의 모든 맥주는 에딩의 양조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바이스비어의 가디언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지금은 다양한 양조장에서 바이스비어를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슈나이더 바이세와 에딩거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멋진 맥주를 한국에서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브루어리는 여전히 가족 양조장을 유지하며 바이에른 바이스비어 브루어리(weissbrau)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바이스비어의 ‘뜬금없는’ 비상


바이스비어는 1960년 이전까지 독일 전체 맥주 시장점유율의 3%만을 가진 지역 맥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바이스비어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독일 한 텔레비전에 출연한 의사들이 바이에른의 바이스비어를 소개하며 맥주 속에 있는 단백질과 효모가 건강에 좋으며 특히 여성들에게 탁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후 바이스비어는 ‘건강맥주’로 알려지며 당시 폭발적인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독일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후 바이에른 뿐만 아니라 독일 전지역에서 바이스비어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3%에 불과했던 시장 점유율이 바이에른 맥주 점유율의 30%, 독일 맥주 시장점유율의 10%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 순간에 시장을 잃고 절치부심하던 바이스비어에게 이 뜬금없는 기회는 묵묵히 자신의 가치를 이어가는 노력과 성실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바이스비어 스타일 특징


바이스비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50% 이상의 밀 함유
노 필터링(No filtering), 병내 이차발효(Bottled conditioning)
밝은 황금색과 불투명한 탁도
매우 풍성한 거품과 탄산
바나나와 정향의 아로마
낮은 쓴맛과 드라이한 질감


밀의 높은 단백질은 풍성한 헤드를 만든다. 또한 필터링을 하지 않아 남아있는 효모와 단백질은 맥주를 불투명하게 한다. 바이스비어의 탄산은 매우 풍성한데, 이는 병 안에서 진행되는 이차 발효 때문이다.


향미적으로 가장 중요한 프로필은 바나나와 정향 아로마 그리고 낮은 쓴맛이다. 바나나와 정향은 바이스비어 효모가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향으로 명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또한 쓴맛이 낮아야 하며 입안에서 드라이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야 좋은 바이스비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바이스비어를 헤페 바이스비어(Hefe-weissbier) 또는 헤페 바이젠(Hefe-weizen)이라고 하며 여기서 헤페는 필터링 하지 않아 맥주 속에 남아있는 효모(yeast)를 의미한다.


바이스비어는 갈증 해소에 가장 좋은 맥주로 손꼽힌다. 또한 어떤 음식에도 어울리는 치트키와 같은 존재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 마셔도 부담없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맥주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데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 맥주가 바로 바이스비어다.


대표적인 추천 바이스비어


슈나이더 바이세 마인 오리지널 탭7

Schneider weisse ‘Mein Original Tap7’

슈나이더바이세 탭7 (출처 : 윤한샘) @플라츠

바이스비어의 원조. 보통 탭7이라 불리는 마인 오리지널은 1872년 레시피로 여전히 생산 중인 현대적인 바이스비어의 시초다. 일반적인 헤페 바이스비어보다 색이 어두우며 조금 묵직한 바나나향과 명확한 정향이 오리지널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마셔봐야 하는 바이스비어.


에딩거 바이스비어

Erdinger Weissbier

에딩거 바이스비어 (출처 : 비어케이)

헤페 바이스비어의 바이블. 현대적인 헤페 바이스비어의 원형이라 할 수 있으며, 바이스비어의 대중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맥주이다. 밝은 황금색과 풍성한 탄산, 섬세하고 미묘한 바나나와 정향은 그 자체로도 좋지만,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지만 쉽고 친숙하게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바이스비어.


리겔 바이스비어(Riegele weissbier)

리겔 바이스비어 (출처 : 윤한샘)

뮌헨 북서쪽에 위치한 아우크스부르크 리겔의 대표적인 바이스비어. 매우 명확하고 깨끗한 바나나와 정향이 우리의 코를 즐겁게 한다. 어떤 바이스비어보다 기본에 충실하며 헤페 바이스비어의 전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맹주를 위협하는 새로운 강자.


‘존버’ 바이스비어, ‘존버’ 마이 라이프


바이스비어의 맥생(麥生)을 돌아보면 ‘존버’라는 호가 어울리지 않을까? ‘존나게 버틴다’라는, 비속어가 포함된 이 문장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풍자와 더불어 일말의 희망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한때 바이에른의 대표 맥주로서 찬란했던 시절을 보냈지만 한순간 몰락했던 바이스비어. 이 맥주의 삶을 보면 우리의 인생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인생의 끝이 어떻게 될지, 사실 확신하기 힘들다. 하지만 바이스비어의 밝은 황금색과 풍성한 탄산 그리고 코 끝을 스치는 바나나 향을 느끼며 잠시나마 시간을 멈춰보자. 어려운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흔한 진리를 바이스비어는 넌지시 알려준다. 브라보 존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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