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씩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수제 맥주집에 준비된 맥주 샘플러는 참 요긴한 존재다. 작은 잔 여러 개를 놓고 한 모금씩 나눠 마시다 보면, 선택 장애를 극복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상대방과의 공통된 취향을 확인할 수도 있다.
역시, 어색한 사람과 친해지기엔 술이 제격이고, 각자의 잔을 선택하기 전에 샘플러를 주문한다면 대화의 주제를 조금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낯선 이름의 맥주를 커다란 잔에 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그리고 조금씩 함께 맛봐야 하기에 한 모금에 털어 넣을 수 없는 것.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내내, 우리의 인생에도 샘플러가 존재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홉 향이 낯선 사람이 겁도 없이 IPA를 선택할 일이 없게.
톡 쏘는 자극이 필요한 사람은 에일보단 라거를 선택할 수 있게 말이다.
하나,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시간들
절대적으로는 24시간을 산다. 숙취에 시달리는 주말에는 체감 5시간, 늦게까지 야근을 하게 되는 날에는 체감 30시간 정도를 산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결정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재하는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회사를 때려치웠다. 세상에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으면서도,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되나 계속 생각했다.
알람에 눈을 뜨고, 몸에 익은 듯 출근을 준비하고,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내 책상에 앉는 순간까지. 내가 결정하는 것인지,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인지. 궁금했다.
매 순간 '결정'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인생은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만 잘 치러도 훌륭히 살아온 삶이라. 하지만 그 '결정'은, 대부분 내 몫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했고, 해야 한다고 하길래 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는 것도, 해야 한다는 것도, 모두 누군가를 의식해서이다.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시간. 지금까지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얼마나 살았을까.
둘, 답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리틀 포레스트>는 얼렁뚱땅해서 좋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그게 뭐가 좋다는 표현이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얼렁뚱땅'을 좋은 표현으로 바꿔보고자 고민했는데, 그냥 얼렁뚱땅이 딱 적확한 것 같다. 사실, 난 잘 모르겠다. 혜원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지. 재하가 회사를 때려치운 건 순간의 감정이었을지. 은숙은 정말 서울에 가고 싶은 건지. 짐작이 잘 안 간다. 그리고 작품 역시 짐작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얼렁뚱땅 시작하고 끝낸다.
<리틀 포레스트>가 정확히 말해주는 건, 딱 하나밖에 없다. 혜원과 재하, 은숙이 함께 고향에 있는 동안 참 잘 먹고 잘 웃었다는 것. 딱 그것만 말해줘서 너무 좋았다.
사실 어떻게 답을 내릴 수 있었을까 싶다. 열린 문 사이로 드는 바람과, 혜원의 얼굴. 그다음 장면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괜찮다.
그래서 샘플러가 생각났나 보다. 답을 정해 놓을 거면, 솔직히 미리 맛보게라도 해주면 좋겠다. 이런 맛인지 모르고 시켰는데, 맛이 없으면 누굴 탓하겠나. 한 모금씩 맛볼 수 있게 해주면, 누구보다 잘 고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모르고 시켰으니까, 맛이 좀 없다 한들 어쩌겠나. 사실 첫맛이 씁쓸한 IPA는 마시다 보면 그 향에 취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에일은 톡 쏘는 목 넘김은 없지만, 라거엔 없는 묵직한 바디감을 입 안에 가득 남긴다. 낯설고 어려웠던 첫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다음에도 그 맥주를 시킬지도 모른다.
수제 맥주집에 처음 갔는데 샘플러를 팔지 않는다면, 너무 겁먹지 말고 일단 이름이 마음에 드는걸 아무거나 시켜보자. 샘플러가 주는 신중한 선택은 없을지라도, 인생 맥주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미리 맛볼 수 없는 거, 일단 크게 한 모금 마셔봐도 괜찮다.
맛이 있든 없든, 그건 온전히 내가 결정한 시간이 만든 '운명'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