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왼손으로 그린 비행기와 스노보드

완벽주의 성향의 아이를 움직이게 한 '못난이 그림'과 양손잡이의 비애

1. "엄마는 너무 잘 그리잖아!" - 완벽주의의 함정


튼튼이는 5살 봄이 될 때까지도 크레파스나 연필을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장에서는 날아다니는데, 책상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특수교육과 놀이심리상담 전문가인 지인분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저와 튼튼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인분이 촌철살인 같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니, 아이에게 너무 완벽하게 보여주지 마세요."


저는 머리로는 '기다려야 한다, 소근육이 약하다'라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가르쳐야 한다'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행기를 그려달라는 아이에게 저는 (제 기준에선 별로였지만) 아이 눈에는 너무나 완벽하고 정교한 비행기를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소근육이 약한 튼튼이는 엄마처럼 그리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니, 실패할 게 뻔한 시도조차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높은 눈높이(완벽주의)와 낮은 기능 사이의 좌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전략을 바꿨습니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선은 삐뚤빼뚤, 비행기는 찌그러졌습니다. 완전 엉망이었죠.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 엄마도 잘 못 그리네?"


안도감을 느낀 튼튼이가 비로소 연필을 잡고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모의 '빈틈'이 아이에게는 '용기'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 아빠를 위한 매일 10분: 강력한 동기 부여


연필을 잡게 된 후, 우리는 매일 10분씩 '오리고, 붙이고, 색칠하기'를 했습니다. 지루한 훈련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빠 선물 만들기'라는 작전을 썼습니다.


"튼튼아, 이거 만들어서 퇴근하는 아빠한테 선물로 주자.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힘없는 손가락으로 가위를 쥐는 건 힘들었지만, 선물을 받고 기뻐할 아빠를 상상하며 튼튼이는 꾹 참고 해냈습니다. 힘든 훈련을 '과제'가 아닌 '사랑의 표현'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튼튼이를 움직인 가장 강력한 동기였습니다.


3. "일기를 녹음하면 안 돼요?" - 스노보드의 교훈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글씨 쓰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알림장 쓰기, 일기 쓰기... 튼튼이는 괴로워했습니다.


"엄마, 일기를 음성 녹음으로 내면 안 돼? 왜 꼭 글씨로 써야 해?"


그 절박한 질문 앞에 저는 "학교 규칙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양손잡이였던 아이에게 "오른손으로 쓰면 글씨가 예쁘네"라며 은근히 오른손 사용을 유도했던 제 과거 때문이었습니다.


문득 제가 스노보드 강사 자격증을 딸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는 '구피(Goofy) 스탠스'가 편한 사람입니다. 구피로는 4일 만에 최상급 코스(블랙다이아몬드)를 숏카빙으로 내려올 정도로 실력이 빨리 늘었습니다.

하지만 강사가 되려면 반대인 '레귤러(Regular) 스탠스'도 타야 했습니다. 레귤러로 섰을 때의 공포는 상상이상이었습니다. 평지에서도 넘어지고, 뇌가 마비된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매일 1시간씩, 한 달을 피나게 연습해서야 겨우 양쪽 실력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겨울 시즌이 끝나고 다시 타면? 구피 스탠스는 몸이 기억해서 바로 실력이 나오는데, 레귤러 스탠스는 다시 초보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내 뇌에 깔린 본능적인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튼튼이에게 오른손 글씨 쓰기가, 내가 레귤러로 보드를 타는 공포와 같지 않았을까?'

엄마의 '오른손잡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라'는 배려가, 아이에게는 매일매일 블랙다이아몬드 코스를 반대로 내려와야 하는 공포였을지도 모릅니다.

4. 0과 6의 차이, 그리고 안경 (난시의 발견)


그 어려움은 4학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튼튼이는 숫자 '0'의 끝을 맺지 못해 '6'이나 '9'처럼 썼고, 반대로 '6'을 '0'처럼 쓰기도 했습니다. 수학 문제는 다 맞게 풀었는데, 선생님이 글씨를 잘못 알아봐서 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는 억울해서 엉엉 울었고, 화를 냈습니다.


단순히 소근육 문제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또 다른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검안 박사님을 찾아가 검사를 해보니, 아이에게 심한 난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각 정보가 왜곡되어 들어오니 글씨의 끝을 맞추기가 더 힘들었던 것이죠.


안경으로 시력을 교정하고 나자, 거짓말처럼 글씨 쓰기가 잡히기 시작했고 아이의 정서도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지금 튼튼이는 글씨 쓰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합니다. 밥도 왼손으로 먹고, 가위질도 왼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양손을 다 쓸 수 있어"라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저는 다른 어머니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가 선택하도록 두세요. 뇌가 편한 손이, 아이의 마음도 편하게 합니다. “

[튼튼이의 속마음] "기억나는 건 오직 '억울함' 뿐"

"엄마 글을 보니까 제가 어릴 때 연필 잡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면서요? 솔직히 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일기를 녹음하겠다고 했다고요? 제가요? (웃음) 저는 그냥 제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인 줄만 알았어요.

근데 하나는 진짜 생생하게 기억나요. 4학년 때 숫자 0을 6처럼 썼다고 틀렸던 거요.

저는 분명히 0이라고 썼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6이라고 짝대기를 그으시는 거예요. 수학 문제는 다 맞았는데 글씨 때문에 틀리니까 진짜 너무너무 억울해서 엉엉 울었어요. 그때의 그 답답함은 지금도 생각나요.

엄마가 저를 위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주셨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가 저를 기다려주지 않고 막 다그쳤다면, 저는 아마 지금도 글씨 쓰는 걸 제일 싫어했을 것 같아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


[주원의 거울 일기]

스노보드 위에서 덜덜 떨던 제 다리를 기억해 낸 날, 저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튼튼아, 네가 매일 학교에서 글씨를 쓰는 건, 엄마가 반대 발로 보드를 타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야. 그 힘든 걸 해내고 있었구나." 엄마의 후회와 인정이 닿았을까요. 아이는 이제 자신의 양손을 모두 사랑하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Chapter 12를 위해 참고한 전문 문헌]

1. Gesell, A. (1940). The First Five Years of Life.

아동 발달의 표준을 제시하며, 대근육이 소근육보다 먼저 발달한다는 '두미 발달 원칙(Cephalocaudal Trend)'과 '근원 발달 원칙(Proximodistal Trend)'을 설명합니다.


2. Case-Smith, J. (2005). Occupational Therapy for Children.

소근육 발달 지연이 아동의 학습과 놀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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