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난 몰랐었네
♬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아~ 아~ 아~ 아~ 아~ 아~ 진정 난 몰랐었네♬
골목길 저 멀리서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 “가 울려 퍼지면, 아버지가 곧 도착한다는 신호다. 나는 이때부터 귀를 크게 열어, 혀 꼬부라진 노랫말 인지 또렷하게 들리는지부터 살폈다. 전자의 경우라면 서둘러 잠든 척했고, 후자라면 얼른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기분 좋게 취한 아버지의 두 손에는 호떡 봉지가 들려있을 때가 많았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적당한 음주와 내가 드리는 아부성 발언이 곁들여지면 가끔 뜻밖의 재물이 나오기도 했다.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지폐를 몽땅 던져주는 아버지를 잠시 천사처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술고래’였다. 술집 주인, 직장동료, 심지어 파출소까지 술고래를 모셔가라는 전화가 선거철 여론조사처럼 잇따랐다. 아버지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엄마와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집에서는 독재자, 호랑이 같은 아버지는 집 밖에선 키다리 아저씨쯤 된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술집에 기부하고 귀갓길 노점상에 남아있는 호떡, 튀김, 국화빵을 모조리 책임진다. 한 번은 양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검정 고무로 하반신을 감싸고 수레 끌어 장사하는 모습을 본 키다리 아저씨는 이태리타월, 화장실용 나프탈렌, 고무장갑 등이 실려있는 손수레를 통째도 끌고 온 적이 있다. “묵고 살 그 따고 고마 다 주이소! “했다는 시장 사람들의 증언에 엄마는 가슴이 무너졌다. 이날은 엄마가 애타게 기다렸던 월급날이었고, 두툼해야 할 월급봉투는 이미 홀쭉해져 있었다.
'지금 남의 집 처자식 먹고사는 걱정을 해야 한단 말인가?' 주인집에 내야 할 공과금이며, 보일러 기름값, 부식비 등을 수북한 나프탈렌으로 받아 든 엄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동원해 아버지에게 퍼부었다. 두 분은 자주 다퉜는데, 승률은 아버지가 월등했다. 엄마는 서류에 도장을 찍자고만 했지, 정작 법원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이혼 절차도 모르는 딱 그 시대 아내였다. 이혼은커녕 술고래에게 먹일 북엇국, 콩나물국 등 속풀이 해장국을 끓여 내는 엄마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얼굴과 가슴에서 올라오는 여드름이 몹시 괴로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는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아버지와는 대화 없이 가깝고도 먼 사이를 간신히 이어갔다. 일상 속 대부분의 소통은 엄마와 주고받으면서 되도록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사춘기 강세가 끝나갈 무렵 유난히 추웠던 겨울, 새끼발가락에 동상이 생겼다. 병원에 다녀와 자고 있는데 발가락에 인기척을 느꼈다. 실눈을 뜨고 봤더니 아버지였다. 잘 씻지도 않은 내 발에 입을 맞추고 빨리 아물라며, 주문을 외우고 있는 아버지는 울먹인 목소리였다. 그가 맨 정신에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난생처음 본 나는 덩달아 울컥했으나, 들키지 않으려 자는 척 참았다. 이날 이후 서먹했던 부자 관계가 얼었던 한강이 녹듯 서서히 풀려갔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던 날 동네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켜놓고 주(酒) 당계의 살아있는 전설! 술고래가 알려주는 주법을 배웠다. 이후 결혼 전까지 간간이 아버지와 술잔을 부딪치며, 관계를 가까이 맺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환갑도 안 넘긴 나이에 간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돈보다 더 좋아하던 술도 끊고, 민간요법으로 투병을 시작했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던 그는 텃밭 농사와 화초 가꾸기를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을 주변에 버려진 군자란을 주워다 화분에 옮겨 심고 흙을 꾹꾹 눌러주며 물 뿌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야윌 대로 야위어서 오돌토돌 튀어나온 척추뼈가 웃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니 엄마! 불쌍한 사람이다 아이가? 니가 잘해야 한다 알긋나? 미안하데이” 첫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아버지가 되던 해 아이의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나는 화초를 가꾸는 재주가 없었지만, 다행히 와이프가 아버지 이상으로 화초 가꾸기를 좋아한다. 그가 심어놓은 세 가닥 군자란은 25년이 지난 지금 큰 화분 세 개에 나누어도 모자랄 만큼 번식했다. 매년 봄이 되면 우리 집 베란다에는 짙은 주홍색 군자란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때마다 부친께서 우리 아들 잘살고 있는지 다녀가시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를 원망했던 시간이 대부분이다.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던 적,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 드린 적, 깊게 안아본 적 한번 없던 내가 세 아이의 아빠가 됐다. 몇 장 안 되는 아버지 사진 중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있다. 막내딸이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나는 사진 속 아버지가 되어 같은 자세로 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술 드신 다음 날 고춧가루 기름 낸 뒤 파 송송 썰어 넣어 끓여 드시던 기막힌 아버지 표 라면은 둘째 아들과 끓여 먹고 있다. 집 근처 사거리에서 약 밤을 구워 파는 아저씨를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조건 몇 봉지씩 사는 나를 보면 천상 아버지 아들이구나 싶다.
태어난 지 600개월 만에 조금씩 철들어 가고 있는 나! 자식 키워가며 세상살이 견뎌내는 혹독한 경험을 맛본 후에야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부모 마음은 부모가 돼봐야 안다.'라는 진리보다 그 마음을 조금만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가슴 한쪽 멍울을 담고 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다짐은 아이들이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고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나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