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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바꿈 Aug 04. 2022

제 아무리 맛집 일지라도 내 마음 상하면 맛도 상하더라

순서가 뒤바뀐 순댓국에서 얻은 깨달음 <사진출처 :  Pixabay>


 몸담고 있는 곳에 업무 특성상 기업 방문 외근이 많다. 경영에 보탬이 되는 지원정보를 안내하고, 애로사항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관련기관에 연계하는 일이다. 기왕이면 기업 대표가 있을 때 방문하는 게 보탬이 되기 때문에 나름 꾀가 생겼다.  대표가 사무실에 있는 시간은 오후보다 오전이고, 비 오는 날은 약속된 골프가 취소되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장마철에 약속을 잡으면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날도 태풍 소식이 있었고, 오전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던 날이다.  나는 한 곳이라도 더 들리기 위해 방문 약속을 잡았다.  오전 미팅을 촘촘히 잡다 보면 점심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오전 약속이 오후 약속으로 미뤄지면서 1시간 30분 공백이 생겼다.  '그래 잘 됐다' 비도 오고 오랜만에  순댓국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직장인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1시, 식당은 붐비지 않을 테고 순대 한 점 한 점 천천히 씹어가며 여유있게 점심을 즐겨보자 다짐했다. 


 비 오는 차속에서 90년대 발라드 틀어놓고 분위기 있게 맛집 검색에 나섰다. 마침 약속 장소와 가까운 곳에 줄 서먹는 순댓국집을 찾아 내비게이션을 터치했다. 사무실 밀집지역 상가에 위치한 식당, 예상대로 점심 부대가 먹고 간 테이블만 치우면 자리는 여유로웠다.  '순대만 넣어서 한 그릇 주세요' 주문을 완료하고 앉아있는데 다시 손님이 밀려들어 온다.  내가 식당에 들어가고 난 후 손님이 많아지는 현상은 이제 일상이 됐다. 처음 내 말에 콧방귀도 안 뀌던 가족들도 수차례 눈으로 확인하고 난 뒤 사실을 인정했다. 어쨋든 오후 1시가 넘은 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었던 가게에 나를 포함 여섯 테이블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이놈 순대야 나오기만 해 봐라 맛있게 삼켜주마' 펄펄 끓는 순댓국에 들깨 팍팍 풀어 먹을 생각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식사가 기다리며 항아리에서 꺼낸 배추김치와 석박지를 맛보고 있는데 뜨악!  나보다 늦게 온 손님들 식사가 먼저 나온다.   '뭐지? 곧 내 순댓국이 나오겠지' 했는데 다른 손님이 밥을 말아 떠 넣을 때까지 내 밥은 소식이 없다.  바로 그때 "아휴 이모 5번 안 나갔잖아?  거길 먼저 드렸어야지!" 사장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분노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키오스크 선불 결제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바로옆 마라탕 집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침착하자 그럴 수도 있지 뭐' 상해버린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내 테이블에 준비된 들깻가루, 새우젓, 후추통을 다른 테이블에 갖다 주며 나보다 늦게 온 손님들에게 "맛있게 드세요" 하는 게 아닌가? 결국 꾹꾹 눌러 달래 보려 했던 마음은 치유받지 못하고 상할 대로 상해 버렸다.  순댓국을 간절히 원하던 위장도,  침 고이던 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행위를 멈췄다. 


"죄송합니다  실장님이 실수를 했나 봐요"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칠 무렵 순댓국이 나왔다.  국물을 한 숟갈 뜨고 건더기를 건져 먹는데 조금 전까지 맛있을 것 같던 순댓국맛은 씁슬한 맛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내 앞에 놓인 음식은 좀처럼 남기지 않는 내가 순댓국을 절반 이상 남겼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 등록을 부탁하는데 사장님이 '실장이 바쁘다 보니 큰 실수를 했다'며 연거푸 죄송하다고 한다.  기분은 좋지 않고 남긴 음식은 미안하고 "맛있는 집으로 알고 왔는데 제 입맛에는 잘 안 맞네요 남기고 가서 저도 미안합니다." 하고 나왔다.  부부싸움을 해도 밥을 거르지 않았다. '지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내가 나이 좀 먹었다고 숟가락을 쉽게 놓는다. 이제 좋지 않은 기분일 때 밥 안 먹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제 아무리 맛집 음식 일지라도 내 마음이 상하면 음식 맛도 상하더라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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