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지 않고 단단한 부모님 마음
'성실하게 흘린 땀만큼 보답하는 농업이 세상에서 제일 정직한 업(業)으로 남아야 한다'
장인어른이 품고 있는 철학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 처가로 차를 몰았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마음이 가슴속에 방지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일손이라도 보태려는 생각으로 새벽같이 서둘러봤지만 부모님을 앞지르지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팥을 털고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는 대충하고 얼른 팔을 걷어붙였다.
얼마 전 여름 밭작물 수확할 때도 거들었던 나 이기에 '팥 터는 것쯤이야' 생각했다. 잘 마른 팥 대에 매달린 팥 알맹이를 빼내는 단순한 일인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내 코가 찬 공기나 먼지를 만나면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재채기가 멈추지 않는 고약한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일은 시작한 지 5분 만에 코에서 경고등이 들어왔다. '너는 여기까지가 한계야!' 금세 내 얼굴은 먼지와 콧물로 범벅됐다.
"이 서방은 밭에서 양파 나르는 일을 해야 하는디 덩치에 안 맞는 일 해서 어쩐담" 장인어른이 웃자고 던진 농담을 "별말씀 다 하십니다 하하" 간신히 받아냈다. 뜨거웠던 여름 양파자루 담아 옮기는 작업에 비하면 누워서 피자 먹기 같은 일이지만, 콧속 깊숙이 파고든 알레르기 때문에 빌어먹을 해병대 체험과 같았다. 다만 쉴 새 없이 해도 끝이 안 보이는 사무국 일에 비하면 농사일은 언젠가 끝난다는 보장이 있어 괜찮았다. 흐르는 콧물을 화장지로 틀어막고 입으로 숨 쉬는 통에 입술까지 바짝 말라버렸지만 떨어진 낟알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있는 내 모습에 묘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릇에 모아진 팥 알갱이가 어찌나 곱고 이쁘던지, 땀으로 거두는 곡물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준 하루를 보냈다.
팥이 자루에 담기기까지 모든 비밀을 내 눈으로 확인한 다음, 코로나가 대한민국을 집어삼켜 장인어른 생신조차 가지 못한 비극이 벌어졌던 때, 부모님이 보내주신 택배가 생각났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바리바리 싸주셨을 장모님 마음을 택배 상자에 가득 담아 보내셨다. 모든 걸 멈추게 만든 코로나도 자식 챙기는 부모 마음은 멈추지 못했다. 상자 속에는 팥 한 자루, 파김치, 쌀, 마늘종 무침까지 다양한 먹거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파김치는 작두에 손을 다쳐 수술까지 했던 장모님이 막내딸, 막냇사위 좋아한다고 아픈 손에 고춧가루 잔뜩 묻혔을 테고, 팥 자루 속 붉은팥에는, 봄 햇살을 등져도 시커멓게 탄 장인어른의 고된 얼굴이 함께 들어있었다.
팥은 장시간 불리고 삶아도 여간해서 그 모양이 흩어지지 않는다. 마치 돌이 되려다 곡물이 되어준 것처럼 쉽게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는 팥! 씨 뿌리고, 밭매고, 기르고, 베어서, 이내 말리고, 털어낸 뒤, 돌 고르고 자루에 담아 자식에게 보낸 후 잘 먹으라고 전화해야 비로소 두발 편히 주무시는 단단한 부모 마음과 닮았다. 나와 내 동반자도 고마운 팥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단단한 부모가 되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