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을 빠져나오니 높다란 야자수가 제주라 말했다. 12월이라는 두 자릿수가 무색하게 높은 온도가 제주구나 탄성 짓게 만들었다. 이 여정의 시작은 책방에서 일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늘 여유와 위트 넘치는 정치헌 대표님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던 순간에서 시작한다.
“정민!”
“네, 대표님~”
“가족 여행 가봤나?”
“가봤죠?”
“어른들 모시고?”
“할머니, 삼촌, 가족들이랑 베트남이요?”
“환갑인 어른들이 여행 가자고 하면 가나?”
“네? 무슨 소리세요?”
“12월에 책방 식구들이랑 제주도 가자면 가는가?”
“당연하죠!!! 전 다 됩니다! 모든 날짜가 다 돼요!”
애초에 ‘환갑인 어른들’에 책방 식구들은 속하지 않았다. 눈 뜨고 있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부대끼는 어른들이고 따지고 보면, 아니 얼핏 봐도 범접할 수 없는 커리어의 훌륭한 어른들이지만 평소 나이대를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내게는 그저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든든한 어른, 그들의 경험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가 하면 그들의 혜안으로 미래를 엿보기도 한다. 생각의 폭이 확장되는가 하면 사유의 깊이도 달라진다.
책방 마님 최인아 대표님, 만능 해결사 정치헌 대표님, 다정다감한 정지현 매니저님 그리고 선릉점 매니저 나까지 그렇게 우리 책방 식구 넷은 책방이 오픈한 지 6년 만에 첫 워크숍을 떠나왔다. 이번 워크숍의 목적은 제주 책방 투어로 첫 행선지는 책방 소리소문이었다. ‘작은 마을 작을 글’이라는 뜻을 담은 제주에서 손꼽히는 독립서점이라 예전부터 찜해두었던 곳인데 이 멤버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워크숍으로 책방을 온다면?
1. 최인아책방이 아닌 다른 책방에 식구 넷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웃긴다.
2. 각자 관심 있는 서가에 한참을 서서 취향껏 책을 고른다.
3. 누구랑 왔는지를 잊을 만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4. 천천히 둘러본 다음 각자 고른 책들은 법인카드로 결제한다.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 와서 책방에 온 것도 신기할 노릇이지만 우리 책방 식구들이 다른 책방에서 다른 이가 고른 책들을 둘러보는 풍경도 생경했다. 제주 책방 풀무질, 책방 무사 등 여러 곳을 거쳤는데 책방 안에서 우리는 '따로 또 다 같이' 문구 그대로였고 각자 취향의 서가 앞에 서 있는 모습들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이 모습이 최인아책방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목적지를 한 곳으로 정한 다음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다시 함께 모여 멋지게 마무리 짓는다. 개인의 취향을 온전히 존중받으면서도 함께라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각자 고른 책을 들고 성산일출봉 아래 벤치에서 볕을 쬐며 읽기도 했는데 매일 줄줄이 소시지처럼 촉각을 다투는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에서의 시간과는 분명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안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둘째 날 벌어졌다. 여행코스를 짤 때, 저마다 가고 싶은 곳을 모았는데 책방 마님이 말한 곳은 딱 한 곳, 거문오름이었다. 한 달 전 오전 9시 사전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라 들뜬 마음으로 자진해서 야무지게 예약하고 자랑했었다. 예약해냈어요, 제가!
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차로 40분은 이동해서 1시간 20분 등반 후에 점심을 먹으려면 이른 아침 서둘러야 했다. 넷 중 셋은 지극히 올빼미로 아침에 유독 약한데 거문오름을 보겠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산행을 해야 하니 긴 양말, 경량 패딩 두꺼운 옷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차 안에서는 여기가 그렇게 좋다더라, 국가지정문화재를 넘어 유네스코에도 등재가 되었다더라 기대에 찬 말들을 주고받았다.
거문오름 입구에서 코로나 검열대를 지나 매표소에서 직원의 물음에 ‘백정민으로 4명 예약했습니다~’ 외쳤건만 돌아오는 답은 ‘예약자 명단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 부탁드려요!’ 무의미한 외침과 동시에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 비수가 날아들었다. ‘다른 날짜로 예매하신 거 아니에요?’ 찰나의 순간 수십 번 속으로 되내었다.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절대로 그러면 안 되거든요!’ 서둘러 호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예약 확정 문자를 찾았다.
오늘 날짜 12월 5일 오전 11시. 예매 일자 12월 4일 11시. 내 뒤로는 기대에 찬 세 사람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매표소 직원분은 얄짤없이 선을 긋고 당연히 예외 없이 입장 불가라 말했다. 아찔했다. 실수를 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빠른 이실직고이다! 그것만이 사태를 막는 유일한 방법!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예약을 잘못했어요.”
오잉, 하는 표정이 스쳤지만 달리 방도는 없었다. 무엇보다 뒷말을 잡는 법이 없는 어른들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탓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자, 그럼 주변에 가볼 만한 다른 오름이 있는가?”
“다음에 제주로 워크숍을 또 와야겠네!”
차 안에서 한껏 풀이 죽은 나를 풀어주려 되려 애를 썼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이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쉽사리 퇴사하지 않겠구나, 느꼈던 순간 말이다. 아찔함에 싸늘하게 식었던 등줄기를 토닥여주는 따스함에 안정을 되찾아갔다.
멋들어진 제주의 풍광도 매력적인 독립서점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차 안이다. 한 곳에 숙소를 잡고 제주 전역을 누비니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선곡은 흥 많은 내가 맡았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은 역시 시대를 불문하고 만인을 아울렀고 조덕배, 김학래, 산울림, 노고지리, 송창식 생소한 가수들이 쏟아져 나와 굉장히 신선했는데 특히나 80년대의 감성이라는 가수 한영애의 ‘코뿔소’는 단연 강렬했다.
지금이 더 자유분방하고 강렬할 것 같다는 건 오산이다. 차 안을 광광 울리는 에너지에 소리 질렀다. 앞으로는 괜스레 울적해지는 날이면 ‘코뿔소’를 한판 들어야겠다! 울적함 따위 한방에 몰아내겠구나, 나의 플레이리스트 맨 위에 올렸다.
시간이 지나도 여행 때 들었던 노래를 들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시대를 넘나드는 음악과 함께 멈추고 달리기를 반복했던 우리의 3박 4일을 기억할 노래를 꼽으라면 '코뿔소'에 이어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전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졌는데 무려 가로등이 없었다. 일찍이 어둠이 내리는 제주에서 오가는 차들도 드문 도로, 비추는 불빛은 우리가 탄 차량의 라이트뿐인 고요한 밤에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풀벌레 소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전주마저 완벽하다. 차 안 스피커에서 새어 나오는 풀벌레 소리가 차 안인지, 차창 밖인지 구분 없이 어우러진다. 숲 속 한가운데 우리만 가만히 서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제주에서 한적한 숲길을 달리며 들은 '별이 진다네'는 이 여행의 전부다.
좋은 사람들과 평온한 시간을 오롯이 만끽하는 기분, 우리의 제주 워크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