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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 Jun 14. 2024

한 잔 하실래요.

딸깍


김치냉장고에 있던 캔맥주를 하나 딴다. 아니 깐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그릇장에 있는 마음에 드는 글라스도 꺼낸다. 맥주는 다른 잔이 아닌 꼭 투명 글라스에 마셔야 시원한 맛이 더 살아나는 것 같다. 그리고 꼭 김치 냉장고! 이쯤 되니 김치 냉장고는 김치가 아닌 맥주를 보관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 육퇴 (육아퇴근) 후라서 더 맛있는 걸까. 고된 노동 뒤에는 꼭 노동주가 따른다. 어른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중간 새참과 함께 즐기던 막걸리 맛을 이해할 수 도 있을 것도 같다.


난 애주가다. 결혼 전에는  술을 좋아하지 않던 아니 싫어하던 엄마 밑에서 함부로 술맛이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워낙 술을 너무 좋아하던 아빠와 다툼이 잦았던 탓에 어릴 때부터 술이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고 소주 냄새를 맡았던 어린 시절에는 과학실에서 실험할 때나 쓰던 알코올 같은 것을 아빠가 왜 그리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친구들과 날씨 좋은 캠퍼스에서 맥주 한 캔을 땄다.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하지만 그때도 극 i였던 나는 여럿이 모이는 술자리를 즐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카페에서 수다 떠는 것이 더 즐거웠다. 


하지만 누가 그랬는가. 인생이 쓰면 술이 달아진다고. 

역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던 학원 강사였는데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라면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이 너무 힘들었을 때, 수업이 일찍 끝났을 때, 동료 남편의 출장으로 집이 비었을 때…등등 어떤 제목을 붙여서라도 맥주 한잔을 기울 이곤 했다. 맥주에는 치킨, 마른안주, 떡볶이와 함께 상사의 험담도 빠지지 않는 안주 거리였다.

둘째의 수유를 끝내고 오랜만에 한 잔

그리고 결혼을 했다. 만만치 않은 애주가를 만났다. 남편과 난 연애 기간 동안엔 거리가 있어 술을 자주 마시지는 못했다. 종일 데이트를 하고 나면 마지막 코스는 우리 동네 근처의 대형 마트. 맥주 피쳐와 떡볶이를 사들고 남편은 차를 타고 자신의 거처로 귀가한다. 현 남편인 전 남자 친구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는 자신도 회사 기숙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통화의 마무리에는 이제 맥주 한잔과 영화를 볼 거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 후  두 애주가의 만남이었으니 신혼 생활은 눈에 뻔히 보이는 일 아니었을까.


신혼의 달콤함은 술로 채워졌다. 월요일은 새로운 시작이니 한잔, 화요일은 동네에 떡볶이 트럭이 오는 날이니 떡볶이와 한잔, 수, 목은 가끔 건너뛴다 해도 금요일은 넘길 수 없지. 한주를 열심히 살아 냈으니 한잔. 토요일은 우리 둘의 최애 프로그램인 무한 도전과 함께 한잔… 그렇게 둘 다 뱃살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물론 잠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난 음주 라이프의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육아를 하며 신혼의 단꿈에서 육퇴 후의 힐링 타임으로 제목만 바뀌었을 뿐 음주 라이프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알코올을 입에도 갖다 대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나쁜 부모인가 싶기도 한데, 또 적당히 즐기고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교육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분위기를 잡고 싶은 날엔 와인을,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곱창에 소주 한잔이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에는 뭐니 뭐니 해도 지글지글 기름냄새 폴폴 풍기는 부침개와 함께 막걸리가 제격이다. 그리고 늘 냉장고 한편에는 캔 맥주가 디폴트. 육퇴 후 힘들면 언제든지 쭉 들이킨다. 


글을 쓰고 보니 어지간히 애주가 인가 싶기도 하지만 슬프게도 주량이 엄청나지는 못하다. 임신으로 인해 잠시 중단해서 인지, 노화와 함께 온 체력 저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캔맥주 3캔을 연거푸 마시고 다음날 산 송장처럼 하루를 날려버린 추억 같지 않은 슬픈 추억이 있다. 체력을 좀 높여 보면 괜찮아질까. 언젠가는 바이킹의 후예들처럼 큰 얼굴 만한 맥주컵에 맥주를 가득 담아 벌컥벌컥 마셔보고 싶다. 그리고는 캬! 물론 숙취는 없어야겠지. 이쯤 되니 술을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은 독일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 by pixabay

물론 질병관리청에서 늘 말하듯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상실이나 치매를 유발하기도 한다고 한다. 뭐든 적당한 게 제일. 가끔 기분이 즐거울 정도로만 즐겨야지. 오늘은 금요일이 아닌가. 주부에게 주말이란 휴일이 아닌 주말 근무가 다가온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불금. 게다가 더운 날씨까지 나를 꼬드기고 있다. 그렇다면 맥주 한 캔. 맥주로 열심히 충전하고 주말 동안 또 열심히 아이들에게 열심히 사랑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주어야겠다.


이쯤 되니 어쩌면 알코올은 나의 에너지 충전제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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