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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 May 31. 2024

전업주부가 어때서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에 두부를 툭 썰어 넣는다. 송송 썰어진 파도 한 움큼 들어가면 이제 양념이 잘 스며들기만을 기다린다. 시큼 달큼한 냄새가 온 주방에 흩어진다. 아이는 밥이 언제 되냐고,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김치찌개 냄새를 맡은 아이의 표정에 웃음이 번진다. 마지막 간 보기 찬스. 한 수저 떠보니 음.. 이제 됐다. 그 옛날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이다. 내 손으로 엄마의 맛을 낼 수 있다니. 스스로 뿌듯해지는 순간이다.


난 전업주부다. 매일같이 가족들의 식사를 담당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속옷이 떨어지지 않게, 다음 날 필요한 옷을 미리 세탁해 두는 것도 내 몫이다. 집안 곳곳의 쓰레기를 정리하고, 화장실의 휴지가 떨어지지 않게 비축해 두는 것도 더해진다. 살림이 뭐 그리 어려운 거냐고, 집에서 노는 사람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 하다 보면 이것도 꽤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고, 숙련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은 살림 외의 일이 하나 늘었다. 소심한 줄만 알았던 꼬맹이가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면서부터 유치원 하원 후 놀이터에 출근 도장 찍는 게 일상이 되었다. 덕분에 간식과 장난감등 이것저것을 챙겨 꼬맹이의 놀이터 지킴이가 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주부인 내 임무에 추가되었다.

아들이 놀 때까지를 기다리며


대학입시에 실패를 했다. 지금 만큼만 철이 들었더라도 좋았을걸. 덕분에 재수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편입을 했고, 졸업 후에도 취업을 위해 새로운 교육과정을 더 수료했다. 물론 학창 시절에도 공부를 놓은 것은 아니었다. 교육열이 다소 높았던 엄마 덕에 피아노도, 수영 등 참 어려가지를 배웠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학원비며 학비를 많이 썼다는 이야기. 남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도 채우고, 부모님께 용돈도 드린다던데 난 참 가성비 떨어지는 자식이었다. 그렇게 많은 학비를 쓰고 멋들어지고,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직업을 가졌으면 좋았으련만 가성비를 채우지 못한 나는 지금 전업주부가 되었다.


전업주부의 가장 큰 장점.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오전에 아이들을 학교로, 유치원으로 보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나만의 시간이다. 긴장을 풀지 않고 빨리 집안일을 해치우면 아이들이 오는 오후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주말 내내 시달려 너무 피곤한 월요일 같은 경우는 오전 시간에 커피 한잔과 함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오후쯤 정신을 차린 후 할 일을 끝내곤 한다. 어쨌든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 오후 육아 출근 전까지는 여유롭다.  


여느 현대인들이 그렇듯, 일을 대충 끝내놓고 핸드폰을 켠다. 커피 한잔의 여유. 집이 완벽하게 번쩍번쩍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덜덜덜 돌아가는 세탁기에 빨래는 잠시 맡겨두고 다른 세상을 둘러본다. 오프라인에서 사회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온라인에서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뉴스를 검색해 본다. 핫한 연예 소식도 빠질 수 없지. 다음 차례인 맘카페를 둘러봤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카페에 전업주부에 대한 글이 올라올 때마다 모르는 척 지나칠 수가 없다. 워킹맘이 전업주부가 부러운 이야기, 반대로 전업주부가 아침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워킹맘이 부럽다는 이야기 등. 나 역시 전업주부도, 잠시 워킹맘, 아니 알바맘도 해봤기에 두 가지 모두 격렬하게 공감한다. 하지만 가끔 누구 하나를 비하하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뒷 끝이 개운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지금 전업주부여서 그런지 전업주부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더 크게 와닿았다. 전업주부는 남편에게 너무 의존하게 되니 나중에 남편이 헤어지자고 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일이 있어도 참게 되거나, 아니면 헤어지고 난 후 삶이 너무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불안한 미래를 위해서는 전업주부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글을 읽으면서도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과연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나중에 내 상황이 혹시나 안 좋게 바뀌게 되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이대로 가정에만 충실해도 되는 건가? 갑자기 전업주부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전업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by pixabay

분명 나도 학위를 받았고, 직장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그럴듯한 비즈니스 우먼은 아니었지만 다달이 내 통장에 ‘급여’라는 글자가 매 달 꼬박꼬박 찍혔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초조함 뿐인가.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또 다른 글을 보게 되었다. 20여 년을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남은 게 아픈 몸 밖에 없는 것 같다고 너무 삶이 허무하다는 글이었다. 글을 보면서 내 미래인가 싶어 더 불안해지려는 찰나 작성자를 위로하는 댓글을 보았다. 몸은 비록 아플 수 있지만 예쁜 자녀들이 남아있지 않냐는 것. 그렇다. 아마 글쓴이의 시간과 노력이 있었기에 자녀들을 잘 키우고 가정이 잘 지켜질 수 있었겠지. 글 작성자가 주부로 보낸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글을 읽다 보니 주부로서 내 이름을 잃었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주부인 이 시간만큼은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오롯이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워킹맘이 되는 날이 오면 오늘을 그리워할 수 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언제 지금처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워킹맘이든, 전업주부든 누가 더 잘나고 못난 비교 대상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상황에 맞게 워킹맘이 될 수도, 전업주부도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언젠간 나 역시 비싸고 힘들게 딴 내 학위와 경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도 혹시 몰라 오늘도 나는 핸드폰을 열어 취업앱을 열어 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리저리 한참을 둘러보다 결국 다시 한숨과 함께 앱을 닫는다. 아직은 내 이름을 찾기보다는 아들이 부탁해 놓은 포켓몬 카드를 찾아보는 것이 먼저인가 보다. 다음 식사는 또 뭘로 준비하지. 전업주부의 길도 결코 쉽지만은 않다. 소심하게 외쳐본다. 전업주부가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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