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중앙공기업, 지방공기업을 경험한 13년 차 K-직장인 이야기 2
건설사 퇴사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대기업 직장인'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30대에 백수 취준생으로 신분이 바뀌는 경험을 한 나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두 번째 취업준비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자리를 잡았어야 할 나이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때때로 나를 짓눌렀지만, 그럴수록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취업준비를 하겠다는 계획을 가족에게 밝혔을 때, 어머니는 실망을 감추지 않으셨다.
다운(가명)아.
퇴사를 한다고 했는데 집을 나가서 따로 방을 구해서 생활하는 게 어떠니?
가족 단톡방에 어머니가 남긴 메시지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자랑이었던 '대기업 다니는 아들'이 스스로 그 타이틀을 버린다고 하였을 때 얼마나 실망감이 크셨을까. 게다가 당시 어머니께서 항암치료 중이셨기 때문에 심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실언을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우선 서운함을 억누르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퇴사 이후 정기적인 소득이 사라질 텐데, 취준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 셋방을 구해 생활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될 것이 명백했다. 차라리 부모님께 월세를 대신하여 약간의 생활비를 드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다.
외롭고 고단한 취준생활을 혼자서 견뎌낼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처음 퇴사를 고민할 때도 가족 곁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최대한 빨리 재취업에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우선은 나의 서운함을 뒤로하고 어머니의 상실감을 달래 드려야 했다.
앞으로 취업준비 하는 과정이 많이 외롭고 힘들 텐데 가족들 곁에 있고 싶어요.
앞으로도 생활비는 매월 드릴게요.
대기업에 다닐 때 매월 부모님께 약간의 용돈(2~30만 원으로 기억한다.)을 드렸는데, 그 금액을 그대로 드리는 조건으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이셨다.
이런 해프닝을 겪고 본격적인 취업준비에 돌입하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4월에 퇴사를 한 나는 빠르면 상반기, 늦어도 그해 하반기에는 재취업에 성공해야 했다. 하루를 꽉 채워 쓰기 위해 스터디카페 기간권을 구매해서 사용했다.
07:00 스터디카페 출근
11:00~12:00 점심식사
17:00~18:00 귀가 후 저녁식사
18:00~ 마무리 공부 후 휴식
평일 일과를 이렇게 보냈고, 주말에는 NCS와 전공시험 대비 취업스터디 모임에 참여하며 남는 시간에는 다시 스터디카페로 돌아와 개인공부에 매진했다.
스터디카페 안,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30대의 나는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은 이제 막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이미 겪어본 세상을 뒤로하고 다시 출발선에 서 있었다. 늦깎이 취준생이라는 자격지심이 들 때마다 나는 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문제집에 파고들었다.
평소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 아니었기에 하루 종일 취업준비를 위한 공부에 몰입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환기가 필요할 때면 구립 도서관의 열람실에 가거나 카페로 자리를 옮겨가며 집중력을 유지했다.
공부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PC방에 가서 1~2시간 게임을 했다. 피파온라인을 즐겨했었는데, 게임에 소질이 없으니 할수록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곧 그만두었다.
취업을 목표로 삼은 것은 공기업 전기직이었다. 공항공사, 한국전력공사, 발전사, 철도공사, 전기안전공사 등 전기직을 채용하는 공기업은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공기업 서류전형 합격에 필요한 스펙(쌍기사와 OPIc IH 등급, TOEIC 905점)은 대기업 건설사에 재직하면서 만들어 두었고, 관건은 NCS와 전공시험이 있는 필기 전형이었다.
상반기 전형에서 필기 전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불합격의 고배를 마시던 6월의 어느 날, 오랜 기간 우리 가족과 함께한 강아지가 하늘나라에 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함께한, 마치 친동생처럼 사랑했던 아이였다.
백수가 되면서 기대했던 한 가지 행복은 이 녀석을 더 많이 볼 수 있고, 매일 저녁 휴식시간에 함께 집 앞 공원을 함께 산책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더 어려워졌다.
형 취업준비하는데 방해될까 봐 그렇게 급하게 떠난 거야?
같이 산책하던 거리였는데 이제 형 혼자 다녀야 되네...
스터디카페를 오가는 길에도 녀석 생각이 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나이에 길거리에서 눈물을 훔치는 꼴이라니. 하지만 이 슬픔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현실은 냉혹했다.
이마저도 이겨내야만 했다.
상반기 전형이 소득 없이 끝났고, 하반기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를 악물고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몸이 편치 않아 응급실에 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 놀라 뛰쳐나와 조용히 하늘을 보며 기도를 드렸다. 해외파견 이후 교회를 안 나간 지 오래라 큰 신앙심은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간절했다.
제발 우리 할머니 지켜주세요.
제가 취업하는 모습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간절함을 들어주신 건지 다행히 할머니는 회복하시고 댁으로 돌아오셨다. 마음이 너무 춥고 고단했다. 그래도 이겨내야만 했고, 애써 더욱 몰입해서 취업 공부를 했다.
하반기 전형이 시작되자 점차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총 4개의 공기업 필기전형에 합격했다. 그중 안전공사는 스스로 면접을 포기했고, 발전사 한 곳은 면접일정이 다른 회사와 겹쳐서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한 중앙공기업의 경력직으로 최종합격 했고, 지방공기업 한 곳에는 예비합격을 하게 되었다.
중앙공기업 경력직에 최종합격 했을 때, 가장 먼저 여자친구에게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여자친구는 통화 중에 울음을 터뜨렸다. 30대 늦깎이 취준생 남자친구를 둔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숨죽여 기도해 왔을지, 그 눈물 소리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나보다 더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빤히 보여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안쓰러웠다고 한다.
그 여자친구는 지금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었다.
대기업의 타이틀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나를 지탱해 준 가족의 사랑과 가장 힘든 계절을 함께 견뎌준 사람의 소중함이 보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직장이라는 타이틀보다 더 지키고 싶은 '인생의 진짜 우선순위'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