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롱패딩 장사는 흉년이라고 한다. 그만큼 날씨가 따뜻하다. 친절한 날씨의 응원을 받아 태어나 처음으로 자발적 등산을 가기로 했다. 연휴 첫날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안 하던 짓도 했다. 이른 아침 친구와 도봉산으로 출발했다. 6년 만의 등산이었지만 순조로웠다. 1시간 반 동안 돌과 나무뿌리를 계단 삼아 첫 번째 이정표에 도착했다. 표지판을 보니 정상인 오봉까지는 50분이나 더 걸렸다. 우리는 배도 고팠고 체력 소비도 딱 적당히 했다고 느꼈다. 하산하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20분만 더 가면 오봉이 나와."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인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장비와 차림새로 보아 '등산의 신'쯤 돼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이었다. 등산 초보인 우리가 모르는 빠른 길이 있나 싶었다. 보통의 이정표는 초보 기준으로 가장 오래 걸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지곤 하니까. 정상까지 20분만 가면 된다는데 솔깃했다. 이왕 온 거 정상까지는 가 봐야지. 우리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등산의 신들은 여유로웠다. 웃음 섞인 잡담을 하며 한 발 한 발 가볍게 움직였다. 그 사이 우리의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20분을 넘겼음을 몸이 알려왔다. 시계를 보니 30분이나 지났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오봉에서 사진을 찍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우리가 웅성웅성 대자 메아리처럼 아저씨들 쪽에서도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지. 아저씨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시며 뒤를 돌아보셨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했다. 또 20분만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그 뒤엔 노랫소리가 뒤따랐다. "내려가면~저녁 먹을~시간이나~ 될랑가~" 맛있는 점심을 기대했던 우리는 울고 싶었고, 허벅지와 종아리도 파르르 흐느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오봉으로 가는 다른 길로 따라나섰다. 그 사이 우리는 높은 경사를 맞아 특공대처럼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고 돌 언덕을 맨손으로 오르기도 했다. 등산 초보에게 분에 넘치는 코스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친구는 땀에 절어 "여기가 지옥이네."라고 했다. 출발 전 다음 주 글쓰기 모임 주제가 지옥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진짜 지옥이 맞았다. 순간이동해서 내려가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내 한계를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지옥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사실 나는 제 발로 지옥에 들어가길 즐긴다. 비싼 돈을 내고 PT를 받는 이유도 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혼자 운동할 때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 때문이다. 트레이너는 혼자서라면 할 수 없는 무게와 개수에 도전하게 해준다. 운동 후 따라오는 근육통으로 내 근육을 성장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를 기꺼이 따르게 한다. 지옥을 상상하는 건 재미있다. 천국보다 훨씬.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나는 세계는 대개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나는 천국이 지루하다. 가장 무기력했을 때는 칼퇴하고 집에 누워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을 때, 회사 일이 한가해서 잡생각이 많아졌을 때다. 친구들은 복에 겨웠다고 하지만 나는 목표가 사라진 뒤의 생활이 두렵다. 아직 이루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지금의 목표를 달성한 뒤 새로운 것이 생기지 않을까 봐 걱정한다. 누군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없으면 천국, 할 일이 많으면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안 할 때나 똑같은 것을 반복할 때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새로운 것이 없는 그곳이 고통 그 자체다. 이쯤 되면 진짜 지옥이 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이정표를 만나게 됐다. 오봉까지 직선로로 10분, 우회로로 25분이었다. 우리가 고민하자 옆에서 선글라스를 낀 새로운 도인이 말했다. 직선로는 5분이면 간다고. 경치도 더 좋다고 했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믿어 보기로 했다. 새로운 도인의 말도 역시나 거짓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는 20분이 걸렸다. 그러나 오르는 동안 다섯 개의 크고 아름다운 봉우리, 오봉을 볼 수 있었다. 반대쪽 우회로로 갔으면 보지 못했을 절경이었다. 산에서 만난 수많은 도인들로 인해 오늘 나의 등산력은 몇 배나 성장했다. 즐거운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