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화장하고 싶을지도,,
회사에 화장을 안 하고 다닌다. 사무실에 있는 여성 대다수가 화장을 하고 다니는데 나같이 안 하고 다니는 사람이 소수다 보니 튀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내 기준 황당한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입사 1년도 안 됐을 시기로 기억한다. 한 부장님과 구내식당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대화 도중 나보고 화장을 안 하고 다닌다고 예의가 없다고 하셨다. 요즘이야 속으로 저렇게 생각해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시대인데 10년 전에는 저런 발언이 지금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어쨌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ENTP인 나는 물음표 살인마가 되었다. 화장을 안 한다고 예의가 없다니? 화장 여부는 기호의 문제가 아니었나? 예의의 문제였나? 대학을 갓 졸업한 나에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어째서 예의가 없는 거지? 화장을 안 하면 못생겨 보이니 미관상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염색도 예의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뿌리염색을 안 하면 나 자신이 못생겨 보여서 뿌리가 올라오면 2~3개월에 한 번씩 뿌리염색을 하고 다닌다. 백발이 본인에게 잘 어울린다며 새치도 아니고 빽빽한 머리숱 전체를 백발로 다니는 그분에게는 염색은 예의가 아니고 화장만이 예의의 영역인 걸까? 뿌리염색은 예의로 쳐주지 않는 건가?
다른 기준도 생각해 보았다.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런가? 나는 운동으로 자기 관리를 한다. 내장지방으로 배가 지나치게 나온 것도 나에게는 자기 관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이를 예의의 기준으로 들이민 적은 없다. 그저 나는 나를 위해 화장보다는 뱃살이 나오지 않기 위해 퇴근 후에 운동을 한다. 그 결과 인바디 내장지방 레벨을 항상 낮음으로 유지하고 있다. 퇴근 후 맨날 술을 드신다는 그분의 높은 내장지방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일까? 대체 예의란 무엇일까?
화장을 안 해서 예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당시 뉘앙스상) 여자라면 모두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일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들도 많다고 하지만 나처럼 꾸미는 데 취미가 없는 여성들도 있다. 내게 화장은 하는 것도, 지우는 것도 무척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로운 일이다. 화장에 관심이 없다 보니 전문적인 화장법은커녕 친구들 어깨너머로 따라 하거나 유튜브 몇 개 본 것이 고작 다다. 기술이 없어서 그런지 기본적인 것만 해도 오래 걸린다. 지우는 시간까지 하면 하루에 40분, 일주일에 5시간, 한 달에 20시간, 1년이면 240시간,, 나는 그 시간을 운동하는 데 쓰고 아침에 조금 더 늦게 일어나고 싶다.
물론 나도 화장을 한다. 기술은 없지만 기본은 한다. 화장을 귀찮아하는 나임에도 화장을 하는 케이스를 관찰해 봤다. 친구들과 핫플레이스에서 약속이 있을 때, 공식적이거나 격식 있는 모임이 있을 때, 남자친구 만날 때, 내 기분이 내킬 때, 기타 화장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등이었다. 공통점은 내가 나 자신으로 설 수 있는, 내가 나로 부각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외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 외모가 인생에서 큰 메리트를 주지도 않았지만 발목도 잡지 않았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정말 화장은 번거롭다. 필요할 때가 많지만 동기부여가 필요한 일이다.
회사에도 처음부터 화장을 안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입사 초에는 열심히 하고 다녔다.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어 부푼 꿈을 안고 화장품도 사고 옷도 샀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점점 화장에 대한 동기부여가 떨어졌다. 왜 회사에서는 화장을 하기 싫을까.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따금씩 고민한 결과, 이른 출근 시간 때문도 있지만 결국에는 회사에 실망을 하게 되면서 그랬던 것 같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회사 생활에 대한 기대와 의지가 사라질수록 화장에 대한 동기부여가 떨어졌다.
회사에 실망을 하게 된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 않다. 업무 외적으로 접하는 눈치문화, 흔히 꼰대짓이라 불렸던 그런 행동들, 군대 같았던 회사,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문화들을 접하는 순간들 때문이었다. 내가 다녔던 회사뿐만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회사를 다니면 느끼는 것들이다. 여러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여러 회사에 이직을 해도 공통적으로 회사라면 느껴지는 바이브다. 업무 외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나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면 따가운 눈총을 받는 그런 문화들 말이다. 부품 같은 일을 하게 되면서 쌩얼이 기본이 되었고 옷도 유니폼같이 비슷한 옷만 입고 다녔다. 내가 사라졌다고 느낀 결과였다.
퇴근 후 화장을 하고 인사를 하면 다들 한 마디씩 한다. 놀라는 사람도 있고 놀라지만 티 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밖에서만 성의 있게 다닌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무 편하게 다니면 직장 생활을 열심히 안 하고 예의가 없어 보이는 걸까? 물론 화장에서 멀어진 이유를 종합해 보면 회사를 대충 다니고 일도 열심히 안 하니까 화장도 안 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건 아니다. 화장은 안 하지만 맡은 일은 무리 없이 수행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적도 많다. 만들어내는 일의 아웃풋이 나쁘지 않으면 꾸역꾸역 일하는 게 티나더라도 회사에서 미움받지 않으면 안 될까? 화장의 여부로 나의 마음가짐이나 일에 대한 태도를 판단당하지 않고 싶다.
물론 나와 달리 화장을 안 하고 다니면서 일을 열심히 하고 회사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이것 또한 불공정한 것 같다. 그냥 회사에서는 일을 대하는 태도보다는 일의 결과물로만 평가받고 싶다. 이러면 프리랜서인가? 나는 회사가 정말 안 맞는 것 같다. 나는 어떤 일로 프리랜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딱히 없다. 노답이다.ㅎㅎ
왜 화장을 하는 것은 디폴트일까. 그냥 다 같이 화장을 안 하고 다니면 좋겠다. 화장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스스로도 아직 화장을 하는 게 더 좋은지, 안 하는 게 더 좋은지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외모를 치장해서 예뻐 보이고 싶기도 한데 귀찮기도 하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하다. 의외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화장을 하고 싶은 곳이 회사였으면 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회사가 나 자신일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회사에 화장을 안 하고 다니는 나지만 누구보다 화장을 하게 되길 바라는 나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을 때 화장을 할 수 있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