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면접을 봤다.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뽑은 예상 질문들이 나와 주었다. 그에 맞춰 준비한 모범답안을 말했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면접장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싸늘한 공기가 감지되고 나서야 내 입에서 현 직장 사수에 대한 험담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책이었다. 상황은 수습될 수 없었다. 며칠 뒤 나의 면접 결과도 수습되지 못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는지 모른다. 분명히 면접 전에 현 직장에 대한 부정적인 멘트나 상사의 욕은 금물이라는 팁을 읽었고, 몇 번이나 되뇌었던 나였다. 찬찬히 면접장에서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주책스럽게 상사 험담이 술술 나오기에 앞서 이런 질문이 있었다. '어떤 스타일의 상사와 일하기 힘든가요?' 부정적인 답변이 나오기 쉬운 질문이었다. 이런 걸 함정이라고 배웠다. '질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놓친 것이 패인이었다.
상처를 수습한 며칠 뒤, 네이버 실검에 감스트가 올랐다. 유튜브 생방송 도중 여자 BJ 성희롱을 했다는 것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저질이었다. 감스트는 도대체 왜 이런 말을 주책스럽게 하게 된 것일까. 여러 기사 중 한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감스트의 답변에 앞서 '여성 BJ의 방송을 보며 자위한 적이 있냐'라는 질문이 있었던 것이다. 감스트의 잘못은 두 가지였다. 더러운 말로 답변한 점, 질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점.
우리는 어려서부터 빠르게 답을 낼 것을 요구받는다. 모든 시험에는 제한 시간이 있고 문제를 빨리 풀면 칭찬을 받는다. 답을 빨리 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 사이 질문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다. 이 질문이 어떤 답변을 얻기 위한 것인지, 답변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생각하는 순간, 시간에 잡아 먹힌다. 답변을 얼른 입으로 내뱉고, 얼른 그것에 대한 평가를 받는 데 익숙하다. 무엇을 위한 속도전이었을까.
사회는 질문하는 사람보다 답변하는 사람에게 뭇매를 때린다. 주책스런 답변으로 면접에서 탈락한 것도 나고, 세 명이 함께한 유튜브 방송에서 질타를 받은 것도 감스트다. 면접 탈락 결과에도, 감스트 뉴스에도 질문자는 타격받지 않는다. 불공정하지만 답변자가 좀 더 조심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빠르게 답변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철학자가 인간 지성의 핵심을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역량으로 설파한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정신 줄 똑바로 잡고 있지 않으면 주책 부리고 이불킥 하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