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금 여기에
Carpe diem.
나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와 유명해진 라틴어이다.
seize the day, 현재를 즐겨라... 이런 의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이 말에서는, 지나가버린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로 시선이 갈 때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다. 오직, 오직 현재만 있다는 단호한 선언이랄까.
여행만큼 선명하게 현재성 혹은 현재 지향성을 드러내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지금’ 원하는 곳에 가고, ‘지금’ 아름다움을 누리고, ‘지금’ 행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여행인 것이다. 내가 여행의 이런 본질에 대해 더 깊이 느꼈던 건 2018년의 스위스 여행, 그리고 2019년의 프랑스 여행이었다.
2017년 2월,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았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평소 워낙 건강하고 체력이 좋던 엄마에게 갑자기 찾아온 병은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슬퍼할 틈도 없이 적응해야 하는 여러 상황들이 휘몰아쳤다. 항암 화학요법-수술-수술 후 항암요법과 방사선 치료...로 이어지는 긴 치료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고 매 순간마다 제한된 정보들을 가지고 중요한 결정들을 해야 했다. 나는 이전에 느껴온 인생의 어려움이나 갈등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나는 엄살쟁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 정확히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겠는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들을 모두 눌러둔 채, 든든하고 쓸 만한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 애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게 다 끝나면 엄마랑 꼭 여행을 가야지!’
긴 치료의 과정 동안 수시로 생각하고 일기에 적고 다짐하며 또 기도했다. 엄마는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크고 작은 위기들을 넘겨가며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과정이 마침내 끝났고 2018년 여름, 부모님과 동생, 나는 스위스로 떠났다. 엄마가 제일 원하던 여행지였다. 또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 후의 여행이기도 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광과 좋은 날씨가 그간 힘들었던 우리 가족을 가만히 위로하고 품어주는 것만 같았다. 입 벌어지는 풍경의 알프스 산맥에서 트레킹을 하고, 기차로 리기산에 오르며 호수와 산의 풍경에 감탄하고, 로이커바트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돌산을 보며 온천을 하던 꿈같은 시간들 속에서 엄마도, 나머지 가족들도 우리를 짓누르던 병에 대해 잠시 잊고 훨씬 가벼워졌다. 이곳에서의 모든 시간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지난 1년여간의 고통에 계속 사로잡혀 있거나, 치료 이후의 경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집중하지 않고 우리는 현재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충만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다음 해에는 아빠의 팔순 생신 기념으로 남편, 제부도 합세하여 6박 8일간 프랑스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휴가 일정을 서로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서 유럽까지 여섯 명이 자유여행을 다녀온 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매우 무리였다. 짧은 일정에도 파리는 꼭 넣어야 한다는, 그래도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 가봐야 한다는 의견, 최대한 여러 곳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요청, 안 가본 곳 위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 계속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좀 부담스러우니 이동 차량을 두 대로 하는 게 좋겠다는 아이디어... 각각의 의견과 사정을 반영하여 계획을 세우고 다소 빡빡하게 일정을 짰다. 장시간 운전을 하고, 잘 모르는 남의 나라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이리저리 헤매며 6명이 함께 여행 일정을 소화하느라 다들 애를 많이 썼다. 비용도 많이 들었다.(아빠가 다 부담하긴 했지만.)
내가 이 무리수의 여행을 열심히 밀어붙여 성사시킨 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싶다. 다녀온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할 줄이야. 주로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을 다녔던 엄마, 아빠는 훨씬 더 재미있어했고 여행 내내 딸, 사위들보다 쌩쌩한 컨디션을 유지했다. 평소 정적으로 지내는 편인 아빠도 여행 중엔 생기가 넘쳐 보였다. 지금도 프랑스 여행의 사진들을 보면 모두가 행복한 표정들을 하고 있어, 그때의 기분과 분위기가 그대로 지금 여기에 전달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가기 전에 알아보고 준비하는 모든 수고를 따져보면 여행은 사실 저항이 걸리고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다녀온 후에는 그대로 원래의 현실로 돌아오게 되며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결과물 같은 것도 없다. 여행지에서 건진 사진 몇 장 외에는. 여행이란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여행 당시의 그 순간들은 더 소중해진다. 오직 ‘지금’만 있는, 앞날을 위해 원하는 것을 참거나 뒤로 미루지 않는, 마법 같은 시간이 바로 여행의 시간이다.
최근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친구의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재차 권유하던 아들에게 아버지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둔 후에, 몇 년 뒤에 꼭 가겠다고 하셨단다. 평소 건강하시던 친구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진단된 병으로 짧은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끝내 이탈리아에 가보지 못하신 채로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인생이고, 죽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참 아팠다. 친구가 이탈리아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게 될 회한 같은 것이 어렴풋이 내게도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다. 그리고 여행은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