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항들

보존과 개발에 관하여

by perezoso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된 긴 투쟁과 대립으로 몇 년 전 자주 언론에 노출되고 시끄러웠던 곳이다.

강정마을과 가까운 서귀포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잔뜩 흐린 어느 날 아침, 혼자 길을 나섰다. 오래되어 보이던 켄싱턴 리조트와 강정천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해군기지 반대 싸움 4765일째’라고 쓰인 나무판이 나타났다. 구속된 이의 석방을 촉구하는 내용, ‘거짓과 폭력 위에 세워진 해군기지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는 글들이 보였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

<한국 순교 복자 수도회>라는 천주교 수도회에서 붙인 현수막에 쓰인 문구도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이 습한 날씨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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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들이 잔뜩 붙어있던 길을 지나자 <제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언뜻 들어서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이름의 해군기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 함께 보이는 <서귀포 강정 크루즈 터미널>까지, 거대하고 위풍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회색의 건물도 보였는데, 겉면에 새겨져 있는 고딕체의 성경 구절과 십자가 모양을 볼 때 해군 교회가 아닐까 싶었다.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와 함께 하리라 1 열왕 11, 38”

여기에서의 ‘너’는 누구일까? 해군 교회의 신자들과 해군기지를 반대한 신자들이 섬기는 신은 같은 신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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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모습 그대로의 제주의 자연과 마을공동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긴, 신부님들이 쓰신 기도문을 천천히 읽고 있자니 울컥 눈물이 났다. 강정마을 투쟁 당시에 나는 (피상적인 수준이었지만)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강정마을에 한번 와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방문했던 적은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고 이 싸움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로 나는 무관심해져 버렸던 것이다. 저 거대한 기지와 그에 비교되는 초라한 저항의 흔적들... 투쟁본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쓰러져가는 가건물에는 한 외국인이 들어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옳고 그름 이전에 힘의 논리로 결국 결정이 되어버리곤 하는, 세상의 일들이 돌아가는 방식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의 모든 힘든 싸움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자신을 거는 사람들... 나는 당사자도, 이해 관계자도 아니지만 왠지 모를 좌절감과 부끄러움이 함께 느껴져 마음이 힘들어졌다.

인터넷에 ‘강정마을’을 검색해보니 2020년 9월 1일 자 뉴스들의 헤드라인이 뜬다. 「13년 만에 고개 숙인 해군···강정마을에 공식 사과」 「부석종 해군총장 강정마을 사과 놓고 입장 엇갈려」 「“굴욕적인 강정마을 민군 상생협약 규탄한다”」...

아직도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은 상태다.


‘보존’과 ‘개발’ 간의 대립은 제주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제주 2 공항 건설, 비자림로 도로확장 공사 문제 등이 첨예하게 대립 중인 모양이다.

하루는 차로 중산간로를 다니면서 바다와는 또 다른, 오름과 나무들이 계속 이어지는 중산간 지역 특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삼나무가 잔뜩 베어져 있는 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환경단체와 상가번영위원회에서 각각 공사를 멈추라고, 또 어서 시행하라고 촉구하는 현수막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tv 화면을 통해 뉴스로 볼 때와는 달리 이 상황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저 근사한 나무들을 저렇게나 많이 베어버리다니... 왠지 저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너무 서운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 전 제주에 놀러 왔을 때, 곶자왈 공원을 차로 찾아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서울이나 신도시를 연상시키는 빼곡한 건물들과 아파트 단지, 학원, 부동산 등이 즐비한 곳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알고 보니 국제학교 근처에 조성된 마을인 모양이었는데 좀 충격적이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제주에서 보면 안 될 몹쓸 것들을 본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제주도민이 아니고, 제주에 살면서 생계 활동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고 실생활을 하는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끔 이곳에 방문하는 여행객을 위해 제주도는 무조건 보존되어야만 한다고, 어떤 개발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너무 이기적이고 말이 안 되는 의견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서울과 점점 비슷해지는 제주를 상상해보면 정말이지 섬뜩해진다. 차도가 점점 넓어지고, 그 길을 다니는 차들이 더 늘어나고, 아파트가 더 많이 지어지고, 온갖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그에 비례하여 나무와 평원과 오름과 숲들은 차츰차츰 줄어드는, 결국 시끄럽고 번잡한 곳으로 변모하게 되는 제주...

장기적으로 제주의 가치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무분별한 개발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해안가를 다 점유해버리다시피 한 많은 숙소와 카페들, 풍광이 끝내주던 섭지코지 주변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해버린 유명 리조트를 보면서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나중에는 제주도의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인 이곳은 바위섬이 물 위에 떠 있다가 물이 다 빠진 갯벌 위에 서 있다가를 반복하는 모습과 그 위에 서 있는 오래된 성이 사실 전부인데 이 성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같은 특이한 모양의 외관을 보여준다. 아주 멀리에서부터 점처럼 작게 보이는 성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고요함이었다. 사람들이 이용하는 숙소와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몽생미셸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관광객들은 숙소에 차를 둔 채 이곳에서 운행하는 큰 버스를 이용하거나 걷기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섬의 주변은 양이 열심히 줄지어 다니는 드넓은 초원과 갯벌(혹은 해안), 나무 데크로 이루어진 긴 길이 전부였다. 잘 보존되어 있는 자연과 다른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몽생미셸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이곳을 유럽의 수많은 다른 성들과 구별되게 만드는 최고의 요소였다. 관광지의 가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프랑스의 문화 수준에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다.

몽생미셸


자연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제주도.

중요한 결정에 대한 권한을 가진 이들이 부디 이러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제주의 개발과 보존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더 이상 멀리에서 무심한 구경꾼으로만 있지는 말자고, 사랑하는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힘을 보태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조용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던 하모해변
손지 오름
다랑쉬오름에서 본 아끈다랑쉬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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