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지는 중입니다
퇴사 직후 심리 상담을 받았다. 퇴사를 하면서 요동치던 물살이 잠시 잔잔해졌지만, 언제 쓰나미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상담을 받기로 했다. 살아보니 예방 주사처럼 중요한 게 없다. 잠깐 따끔하고 나면 크게 아플 거 덜 아프다. 물론 골절상 될 게 타박상이 되진 않지만.
예방 주사 맞으러 상담소를 찾았다. 나는 이전에도 몇 번 상담을 받아본 적 있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다. 상담받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심리 상담사는 내 모든 걸 이해해 줄 거야. 그리고 아주 너그러울 거야'
상담사도 근로자다. 정해진 시간 내에 상담을 끝내야 하고,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태도가 다를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 너그럽길 바란다는 건 정해진 업무 이상을 바란다는 뜻이니, 애초에 그런 생각은 품지 않는 게 좋다.
첫 상담은 20대 후반에 받았다.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었는데 상담사는 입을 다문 채 표정 없이 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황이 민망해져 스스로 휴지를 찾아 눈물을 찍어내자, 왜 우냐고 물었다. 화가 난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말썽쟁이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도 상담사가 날 진정시켜 주고 따뜻한 위로부터 건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진정하게끔 기다리는 것 또한 상담사의 역할일 것이다.
두 번째 상담은 30대 초반에 받았다. 상담을 나가기 전 다짐했다. 나의 기대와 편견에 상대방을 가두지 말자. 나는 그 어떤 기대감을 품지 않고 상담을 받으러 나갔다. 그러니 모든 부분이 편해졌다. 심리 상담사가 해주는 분석, 조언, 위로, 격려가 그대로 마음에 닿았다.
그게 많은 도움이 됐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짚어주니 나의 감정이 명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명쾌하고 시원했다.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들도 익혔다. 좋은 상담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상담. 역시 생각과 마음을 비운 채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에 앞서 필요한 여러 정보들을 공개하고 심리 테스트를 받았다. 그걸 바탕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퇴사한 뒤 마음은 어떠세요?
-앞으로 뭐 먹고살아야 하나 불안하긴 한데요. 그래도 평온해요. 언제 또 이렇게 쉬어 보겠어요.
-실제로 그렇게 보여요. 편안해 보이세요.
-정말요?
내가 편안해 보인다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일할 때는 '밝다, 에너지 넘친다, 씩씩하다' 등의 이야기를 주로 들었었다. 때때로 쓰는 가면이었는데. 가면을 벗고 난 나의 모습은 편안해 보이는구나.
상담을 진행하면서 왜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그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일상과 계획도 공유했다. 상담사는 가만히 들어주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괴로우면서도 개운했다. 평소엔 과거의 일들을 잊고 지내다가 상담을 할 때가 되면 가장 쓰라렸던 기억을 다시 꺼내야 했기 때문에 괴로웠다. 그렇지만 제대로 꺼내볼 수 있어 개운했다.
그래, 나는 이런 일들을 겪었지. 그래서 많이 힘들었고. 그렇지만 괜찮아지고 있는 중이야.
나의 상태를 마주했다. 어쩔 땐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입장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모두 다 내가 겪은 일이 맞나 싶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통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망각의 시간은 길었다.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사가 물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고 하셨잖아요. 만약 지금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면 그들(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요. 전 돌아가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물러서 있는 것일 뿐,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또 괴로워할 것이다.
-아주 나중에 그 어떤 폭풍이 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상태가 된다면 또 모르죠.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힘들고 속상해요. 아직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대화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괜찮지 않다는 걸.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상담사가 말했다.
-본인도 알죠? 본인한테 에너지가 가득하다는 거.
-몰랐어요.
-심지가 굳고 에너지가 가득해요. 어떤 일을 하고, 누굴 만나도, 충분히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잘하실 거예요.
"잘하실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을까?
나는 이제 상담을 받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쓰라린 기억이 떠오르거나, 알 수 없는 불안과 걱정이 겨울 어둠처럼 덮칠 때가 있다. 나의 인생은 밀물과 썰물로 정신없다. 슬픔이 밀려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빠져 웃음을 되찾는다.
살다 보면 밀물에 빠져 죽겠다 싶을 때도 있을 테고, 썰물에 휩쓸려 제자리를 못 찾을 때도 있을 것이다. 정신 못 차리게 힘들면 또다시 상담소를 찾으려 한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도와달라고 소리쳐보려고 한다.
어른도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아야 된다. 어른 뭐 별 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