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도 않지만……밉진 않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났다. 사실 좀 더 혼자 있고 싶었지만,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집을 나섰다. 혼자의 시간이 익숙한 터라 타인을 만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몸집보다 훨씬 큰 옷을 걸쳐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사람처럼, 아침부터 뚝딱거렸다.
약속 시간은 저녁이었다. 그날 할 일을 얼추 해놓고는 화장도 하고 블라우스도 꺼내 입었다. 평소엔 운동복이나 막 입는 추레한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단정한 옷을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 안 입는 옷들을 꺼내 보면서 생각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서랍 속에 처박아둔 고데기도 꺼냈다가 관두고는 머리를 바짝 묶었다. 그래, 여기까지.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일할 때는 이동할 때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해했다. 난 조금도 늦는 걸 싫어했고, 1~2분 늦을지라도 미리 연락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시간에 맞춰 나왔고, 혹시 중간에 문제가 생겨 조금 늦을지라도 별 일 아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건지 모르겠다. 그저 가는 내내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는 게 좋았다.
거의 반년만에 본 동료들은 생기가 넘쳤다. 조금 살이 올랐거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을 뿐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근황 또한 활력이 넘쳤다. 새로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이직을 하는 등등.
서로 격려하거나 축하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만약 우리의 삶을 경기장으로 옮겨놓는다면, 나의 (전) 동료들은 힘찬 달리기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속도를 내고, 민첩하게 인라인으로 들어서고, 땅이 울릴 정도로 뛰고 있는 듯했다.
레이스에 나란히 섰던 나는 오간데 없이, 그들은 그들끼리 치고 나갔다.
이렇게 뒤처진 적이 있었나. 괜히 씁쓸해져서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나도 똑같이 뛰고 있었는데. 열심히 뛰기 위해 시시때때로 스트레칭을 하고,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이 뛰기 위해 무리하기도 했었고.
옛날 생각이 스멀스멀 들 때 2차로 향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동료들과 대화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전에 없던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있는 건가. 그런 착각이 들기도 했다.
동료들은 나의 일상과 근황을 궁금해했다. 최대한 간추린 일상을 전했다. 동료들이 한 마디씩 했다.
"부럽다. 나도 쉬고 싶어."
"잘 쉬어야 또 오래 일하지. 잘하고 있어."
"이왕 쉬는 거 신나게 놀아봐!"
"진짜 건강해 보인다. 너무 보기 좋아."
그들은 나의 불안을 눈치챈 듯, 응원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은 '건강해 보인다'였다. 내가 가장 원하던 것. 쉬는 동안 나를 잘 보살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됐다.
회식이 너무나도 싫고 힘들었는데,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저녁 자리는 편하고 즐거웠다. 진짜 회식이란 이런 게 아닐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소란한 마음속을 풀어내고 서로 조언을 주고받으며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것.
자리를 파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바로 다음 약속을 잡았지만 그때도 내가 나갈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의 다음에 내가 당연히 끼여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 내가 너무 경기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건 아닐까. 뜬금없는 그 모습이 한심하게 보일 텐데. 지금이라도 앞서가는 사람의 뒤꽁무니를 쫓아야 관중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이윽고 텅 빈 버스 안에 노랫소리가 흘렀다. 까만 어둠, 피로하지 않은 몸, 내일이 두렵지 않은 이 밤. 불안함이 조금씩 걷히고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나의 동료들은 서둘러 씻고 내일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또 성실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집에 가자마자 씻고 잘 준비를 하겠지. 내일이 오면 나만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경기장을 뛰는 선수는 아니지만, 언제 출전할지 모르는 예비 선수로서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는 비로소 뒤처지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딱히 자랑스럽진 않다. 그렇다고 나쁘진 않다. 밉지도 않고. 그러면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