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똑똑한 내 딸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by 푸른언덕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딸 선이는 똑 부러지는 성격을 타고났다.

아기였을 때 수저 잡고 밥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혼자 옷 입기까지 보통 아이들보다 손끝이 야무졌다.

놀이방 가야 할 시간인데도 쌍둥이 동생이 장난치며 먹느라 밥 먹는 게 오래 걸리면 옆에서 떠먹인 적도 몇 번 있었다.

말도 빨리한 편이고 목소리도 또랑또랑해서 누구나 보면 똘똘해 보인다고들 했다.


그만큼 욕심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해서 엄마를 힘들게 한 적도 많았다.

선이가 일 학년 때인 것 같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아기 돌보는 장면을 보더니 갑자기

“엄마 나는 아기 안 낳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엄청 부끄럽지만 철없는 젊은 엄마였던 나는 가끔 얄미웠던 어린 딸에게

"왜 너 같은 딸 낳을까 봐?” 하고 슬쩍 웃으며 물었다.


엄마를 빤히 쳐다보던 선이는 기가 죽지도 않고

“엄마는 아이가 말을 잘 들을 줄 알고 낳은 거예요? 원래 애들은 말 안 듣는 거야. 그래서 난 안 낳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육 년도 채 살지 않은 꼬마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서른이 훨씬 넘은 나보다 이런 걸 먼저 깨닫다니 너무 놀라서 어린 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사실 자식이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애들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힘들어하는 엄마들이 많다.

나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쟤는 이해하기 힘들어, 누굴 닮아서 그럴까 하고 힘들어한 적이 많다.


원시시대 동굴에도 쓰여있다고 하듯이 자식들은 부모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어쩔 때는 나 스스로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내 자식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오산이다. 나도 나약한 나를 믿지 못하면서 30년 정도 더 살았다고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실 내 뜻대로만 되는 자식은 나보다 그릇이 작거나 자기 의견이 제대로 없는 아이일 수도 있으니 더 걱정해야 할 것 같다.


나와 닮았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자식이 내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며 나랑 다르면 말을 안 듣는다고 힘들다고 투덜대던 내가

어찌나 한심하던지. 내 엄마와 내가 다르듯이 내 딸은 나랑 다르고 몸을 낳아 주었지 뜻까지 낳아 준 건 아니다. 내 자식은 나를 닮았지만 나와는 다른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생명체인 것이다.

선이의 이런 지극히 현실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은 계속 이어졌다.


미국에서 서울로 전학 온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선이는 교내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왔다.

학교에 적응할 시간도 아직 모자라다고 생각했는데 기특했다.


“우리 선이 열심히 그렸구나, 미술에도 재능이 있었나 보네” 하고 칭찬했더니

“열심히 그린 건 맞는데 내가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야. 잘하는 아이들은 이미 1학기 때 상을 받아서 아직 안 받은 나를 준 것 같아”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선이의 말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초등학교 3학년이라면 그저 상 받은 것으로 기쁘고 엄마한테 칭찬받으면 좋아할 텐데 조금 남다르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 영이도 상 받았어?" 하고 물었더니 막둥이는

“엄마 나는 그림을 다 완성하지 못했어”하고 해맑게 웃는 게 아닌가.

같은 기간 같이 배 속에 있던 쌍둥이인데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이는 고등학교 때 한동안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며 교대에 가겠다고 얘기했었다.

중학생은 사춘기 절정이라 도저히 감당이 안 되고 고등학교 선생님은 너무 일찍 출근해야 하므로 힘들다는 이유로.

초등학생은 선생님이 열심히 하면 그런대로 말을 잘 듣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방학 때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이런 선이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이 수학이나 경제 등 일반적으로 어려워하는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때때로 현실의 따뜻한 면을 못 보고 지나치게 만들기도 한다.

선이 영이와 미국 생활에 관해서 얘기를 해 보면 영이는 주로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힘들었던 부분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선이의 이런 모습도 모두 사랑하지만 무엇보다 바라는 건 내 딸이 행복한 것이다.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분석적이고 예리한 면이 이런 점에서는 안 좋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좋은 기억들도 분명히 선이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누구나 힘든 기억 아름다운 기억을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것을 더 자주 꺼내 보는지에 따라 매일의 행복이 정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선이가 행복한 추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 대표로 뽑혀 동화작가와의 만남에 초대되었던 일, 학부모들이 오는 참관수업에서 유난히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발표해서 거기 왔던 많은 학부모들의 박수와 칭찬을 듬뿍 받았던 일, 옷을 귀엽게 입는다고 패션모델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일들을 소환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그날의 분위기, 그날 만났던 사람들, 그날의 날씨, 그곳의 분위기 등 여러 가지가 다시 우리 앞에 되살아났다. 우리는 우리 딸이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억의 한 귀퉁이를 잡아당겨 밖으로 빼낼 때마다 선이는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순간들이 살아 숨 쉬며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행복한 얘기를 할 때마다 행복이 커져 왔다.


엄마의 소망은 우리 딸이 행복한 것이 제일 첫 번째야, 공부도, 똑똑한 것도 모든 건 그다음이야.

내 딸이 매일 작은 행복한 순간들을 맞이하고 그 기억들을 차곡차곡 마음 한편에 저장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어.


엄마보다 훨씬 똑똑해서 이해하고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도 있었고 엄마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엄마는 우리 딸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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