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준 편지 모음을 꺼내 읽었다
어린 세 아이와 복닥거리며 지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나의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직접적인 손길이 필요한 시간은 거의 없어졌지요.
몇년 전 가을에는 홀로 새벽에 깨어 집안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국에 교환학생 가 있는 딸 아이 선이의 빈방으로 발길이 향하곤 했습니다. 며칠 동안의 여행 빼놓고는 한 번도 내 품을 떠난 적이 귀여운 내 딸.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같이 보이는
나는 개성 만점 아롱이다롱이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한 번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되리라는 계획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늘 제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에게 와 주셨습니다. 둘째가 쌍둥이였기에 전 두 번의 출산으로 만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아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딸만 낳을 수도, 아들만 낳을 수도 있다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꼽아봤지만 내가 세 아이의 엄마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둘째의 임신을 알고 병원에 처음 가서 초음파 검사 후 알게 된 쌍둥이 임신은 그때까지 제가 경험한 가장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저를 진료했던 의사는 이미 아들도 있고 몸도 약해 보이는데 쌍둥이를 낳아서 얼마나 고생하려고 하냐며 낙태를 권유했습니다. 제 건강을 생각하면 빨리 낙태하는 게 좋으니 늦어도 일주일 안에 결심하고 오라고 덧붙이면서. 그 당시는 낙태가 처벌되지 않았기에 가족계획의 일환으로 생각하여 초음파나 양수검사 등으로 성감별 후 여자아이를 낙태시키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행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상상하지 못했던 쌍둥이 임신에 낙태 권유까지 그 혼란스럽던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어긋나는 낙태 권유라며 화내는 형제부터 아이는 안 됐지만, 엄마 인생을 생각하면 쉽게 낳으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분까지 여러 의견이 오갔습니다.
사 남매 중 셋째, 딸 셋 중에 둘째 딸로 태어난 저는 십 대 시절까지 마음속으로 외동딸인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늘 엄마의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 있었기에 절대 아이는 둘 이상 낳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나 둘만 낳아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겠다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단지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에게 찾아온 아이들을 죽인다는 것도 겁많은 저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부모의 체력적 면에서든 경제적 면에서든 아이 셋을 키운다는 건 상당한 부담을 지는 일이니까요. 둘 다 무서워 보이는 미지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결국 우리 부부는 쌍둥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단지 부모의 편의에 의한 낙태에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낳기로 했지만 어떻게 키울지 도저히 자신이 없던 나는 임신 기간 내내 많이 우울했던 것 같습니다. 외출하지도 않고 말도 많이 하지 않고 도대체 아이들이 태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큰애 선이처럼 차분한 아이들이면 키울 만하지 않을까?'
'혹시 아들 쌍둥이면 어떻게 하지? 남자아이 셋을 나 혼자 키울 수 있을까?'
'성별이 다르면 키우는 게 더 힘들겠지?'
'그래도 아들 셋보다는 나을 테니 아들 쌍둥이만 아니었으면 ...'
'기왕 세 아이 키우는 거 아들 딸 다 있으면 좋겠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 불안 속에서 시간은 흘렀습니다. 저는 막달에도 60킬로그램이 채 나가지 않는 상태로 쌍둥이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마취를 시작했을 때 마취약에 취해가면서도 저런 크기 배 가지고 정상적인 쌍둥이가 나올 수 있냐는 간호사들의 무례한 잡담을 들으면서 속에 의식을 잃어갔습니다. 차가운 기운에 눈을 떴을 때 제 팔목에는 하늘색 하나, 분홍색 하나 두 개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정신이 드니 겨우 서른 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중압감과 함께 세상에 나온 내 아이를 보고 싶다는 감정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아픈 배를 진정시키며 면회시간에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가들을 보러 갔습니다. 하나는 분홍 모자를, 또 하나는 하늘색 모자를 쓴 엄지공주같이 보이는 아가들이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각각 2.34 킬로그램, 1.84 킬로그램의 저체중으로 태어났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모든 기관이 완성된 채 세상에 나왔습니다. 단지 안정적인 체중이 될 때까지 인큐베이터에서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나서는 두려움보다 저 작고 연약한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울까 하는 마음으로 더 씩씩해지는 나를 자신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모성애인지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부서질 것 같은 아이들을 내가 잘 품어주고 안전하게 키워야겠다는 그런 감정이 내 안에 모락모락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엄지 공주 왕자들은 다 성인이 되었고 나이 먹는 것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며 세 아이를 키웠던 젊은 엄마는 이제 오십 살이 넘었습니다.
큰 아이가 미국대학 졸업을 하자 이번에는 선이가 머나먼 미국 동부 소도시로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먼 곳에 아이를 보내놓고 다시 마음 졸이는 게 싫어서 이미 영어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니 가까운 중국으로 가서 중국어도 잘하게 되면 너한테 더 좋을 것 같다고 꼬셔봤지만 선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가까운 미국 서부나 직항 있는 동부 쪽을 추천했지만, 그것도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선이는 미국 남동부 작은 대학도시로 떠났습니다.
딸아이의 방에 들락날락하던 어는 이른 아침 책장에서 갑자기 눈에 띈 오래되어 보이는 Sunny라고 적혀 있는 파란색 파일을 발견했습니다. 꺼내 보니 우리가 처음 미국에 갔던 여름부터 1년여 동안 우리 아이들이 저희 부부에게 보낸 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선이가 엄마에게 보낸 것들이었습니다. 만 다섯 살에 영어를 전혀 모르고 미국에 왔기에 처음의 편지는 한글로 쓰여있었습니다. 재희는 학교에 다닌 지 두어 달 만에 짧은 영어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공주처럼 보이게 엄마를 예쁘게 그린 후 ‘엄마 사랑해요. 엄마 좋아해요. 엄마 고마워요’ 라고 써서 제게 주었습니다. 1년 동안 보낸 그림편지가 30장이 넘었습니다. 선이는 한글로든 영어로든 자기가 아는 가장 좋은 단어들로 엄마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달 한 달 시간이 지날수록 단어는 다양해지고 편지는 길어졌고 어떤 날은 그림책처럼 여러 장으로 된 편지를 주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저는 세 아이를 라이드하고 한국슈퍼 미국슈퍼에서 장을 보느라 운전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식자재는 우리나라보다 싸지만 외식하면 팁을 줘야 하기에 비싸서 거의 외식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프랜차이즈 햄버거 집에서 햄버거를 두어번 사먹은 것 외에는 몇 달동안 거의 외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달음식이라고는 피자밖에 없는 미국 소도시에서 배추를 상자째 사다가 김장하는 수준으로 김치까지 담그면서 집안일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의 어린 딸은 일하느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를 그리고 엄마 예쁘다고 엄마 최고라고 계속 사랑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엄마는 차분한 첫째나 혼자서도 상상하며 연필을 돌리면서 잘 노는 막내에 비해 엄마를 자주 찾고 원하는 게 많았던 딸아이가 아주 버거웠습니다. 남들은 딸이 더 수월하다는데 내 딸은 왜 저리 강할까 속으로 불평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나이든 엄마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내 딸이 힘들었던 건 선이와 내가 다른 성격의 사람이어서지 그 아이의 표현방식이나 성격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걸.
저는 딸아이가 보낸 그림편지 두 개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선이에게 보냈습니다.
“선이 예전에 엄마 많이 사랑했었네”
선이는 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당연하지 엄마는 사랑받는 엄마예요”라고.
새벽에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딸아이와 카톡을 주고받은 뒤 한참을 울었습니다.
목 위까지 차서 찰랑거리며 가끔은 질식할 듯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지만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아니 내가 억눌러 나오지 못하게 했던 눈물이 뚝뚝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나만 많이 사랑하고 나만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엄마는 하나인데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 아이 모두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처럼 엄마가 늘 가까이에서 일일이 보살펴 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손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겠습니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약해질 때도 있는 나이든 저의 손을 잡아달라고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처음인 날들을 살아갑니다. 스물여섯에 처음 갓난아기의 엄마가 되었고 살다 보면 익숙해지고 편해질 줄 알았지만 쉰 살에 성인이 된 아이들의 엄마인 나는 처음이기에 저는 아직도 어떤 면에서는 초보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매일 처음인 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들과 함께 매일 처음인 날을 걸어갑니다. 많이 경험한 것 같지만 언제든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과 맞부딪힐 것이고 크게든 작게든 실패하고 슬퍼하고 절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기쁜 일에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날도 올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일은 두렵고 어렵지만, 엄마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습니다. 나에게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을 끊임없이 보내 준 나의 세 복덩이들에게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다시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