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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브라운 Sep 13. 2017

조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적응해라

적응 후에 조직을 변화시켜도 늦지 않다


Question


기획실에 최근 경력직으로 입사한 40대 차장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전 회사에 비해서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몰라도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점이 너무 많네요.


제 부서가 기획실인 만큼 아무래도 조직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제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경영진도 저를 뽑으실 때 그런 점을 기대하신 것 같고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nswer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고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기 위해 제 경험담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경험담


10여 년 전에 제가 H그룹 입사 면접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입사 확정 후 인사팀장님과 미팅을 했는데요. 그때 인사팀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사 후 처음 1년은 일을 벌이지 말고 회사에 적응하는 데에만 힘써라." '경력직 입사자들이 회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의욕만 앞세워 변화를 추진하다 보니 회사에 오히려 피해를 준다'는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입사자한테 할 만한 얘긴가?'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결국 이 말씀이 마음에 걸려 입사를 포기했습니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당시에는 저를 당황하게 했던 그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경력직의 특징 중 하나는 입사 초기에 조직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직이 비효율적,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경력직의 특징 중 하나는 입사 초기에 조직을 바꾸려고 하는 것임
조직이 비효율적,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경력직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한 조직에 10년 이상 몸 담아온 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들이 제3자의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회사에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비효율과 비합리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조직이 그렇게 운영되고 있는 데에는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조직을 겉에서만 봤거나 단기간 동안만 접해본 분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유죠.


조직이 얼핏 보기에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데에는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사례 제시 (1)


보수적인 C사의 예를 한 번 들어드리겠습니다. (C는 '보수'(Conservative)의 첫 글자로 회사명과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얼마나 보수적이냐 하면, 소위 '하면 되는' 회사가 아니라 '될 것 같아야 하는' 회사죠. 


C사는 어떤 사업을 하든 먼저 시도하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항상 경쟁사가 먼저 실행하면 뒤늦게 쫓아가는 '추격자 전략'(Follower strategy)을 구사하죠.


C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경력직은 이를 보고 혀를 내두르죠. 그리고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까지 추격자 전략으로 만족하느냐. 이제는 C사도 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스스로 '변화 전도사'를 자처하죠. 그러면 경영진은 당연히 좋아하죠. 보수적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정체돼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겠다는데 싫어할 상사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변화 전도사'를 자처했던 경력직은 곧 깨닫게 됩니다. 수십 년간 추격자로만 성장해왔던 조직을 하루아침에 '선도자'(First mover)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리고 변화의 목소리를 높이는 과정에서 기존 조직원들로부터 받아온 따가운 눈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난 돌'을 내리치는 정으로 바뀌게 됨을 느끼죠. 그때에는 기존 조직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이미 늦었고요.


앞서 말씀드린 경력직 입사자가 놓친 중요한 사실 하나는 'C사의 영업조직은 경쟁사에 비해 훨씬 탄탄하고 실행력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C사는 추격자 전략을 실행해도 금방 선도자를 따라갈 수 있죠.


C사의 전략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냥 추격자 전략이 아니라 '신속한 추격자 전략'(Fast follower strategy)입니다. 그리고 정말 신속하게 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전략도 그다지 나쁜 전략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창의성은 부족하지만 실행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회사 입장에서는 잘만 실행하면 오히려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죠.


창의성이 부족하고 실행력이 강한 회사에게 '신속한 추격자 전략'은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상도덕상 바람직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효율성 측면만 놓고 보면 현재의 C사에 딱 맞는 전략임은 분명하죠.


변화에 저항하는 조직의 특성을 괴물에 빗댄 그림 [사진 출처: Romero Consulting]



사례 제시 (2) 


모 회사에는 '맥걸'이 있다고 합니다. '맥XX 출신 여성'의 준말이라고 하는데요. 글로벌 탑 전략 컨설팅 펌 출신의 여성 부장이 있는데 "맥XX에서는 이렇게 안 하는데..." 또는 "내가 맥XX에 있을 때에는..."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셔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 펌이 분명 좋은 회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전략 컨설팅 펌의 방식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해서 대기업에서 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가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골치를 썩을 수 있습니다. 


가령 컨설팅 펌에서는 업무가 몰리면 밤낮없이 일을 하고 주말과 휴일도 반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고요. 하지만 그러한 업무 방식을 일반 대기업 팀장이 자신의 팀원들로부터 기대했다가는 '나쁜 팀장'으로 바로 낙인찍힙니다.


전략 컨설팅 펌에서는 프로젝트 기간 중에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면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장기간의 휴가를 다녀올 수 있습니다. 또한 컨설팅 펌 입사자 중에는 '몇 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경험을 쌓고 그에 합당한 높은 보상을 받는 업무 방식'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분들이 많고, 또 컨설팅 펌을 그만두더라도 취업 걱정이 적기 때문에 이러한 고강도 업무 행태에 큰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기업의 경우는 상황이 완전 다르죠. 비유하자면 장거리 육상 선수에게 백 미터 단거리 뛰듯 달리라고 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장거리 육상 선수가 백 미터 달리기 뛰듯 달리면 완주할 수 없겠죠.


또한 컨설팅 펌에서 하듯이 '이슈 트리' 그리고 '미씨'하게 분석할 것을 지시하면 업무를 제 때 못 끝내서 보고 일정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컨설팅 펌처럼 밤을 새워서 일하면 문제가 없지만 맨날 밤을 새울 수는 없잖아요.

'미씨'(MECE) - Mutually Exclusive & Collectively Exhaustive의 약자. 상호 배제와 전체 포괄. 
항목들이 상호 배타적이면서 모였을 때는 완전히 전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겹치지 않으면서 빠짐없이 나눈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미씨'라고 읽는다. (출처: 위키백과)


그 외에도 컨설팅 펌 업무 방식 중 많은 부분이 대기업에서 차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서울 오피스 전체 직원의 수가 300명도 안 되는 기업의 운영 방식을 일반 대기업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죠.


결국 이 '맥걸'이라는 분은 사내에서 공감을 얻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제안


앞서 말씀드린 사례처럼 조직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섣불리 변화를 추진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제시하는 변화 방향은 맞는데 조직의 공감을 충분히 얻지 못해 실행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직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추진하는 변화는 그 방향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화의 방향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조직의 공감을 얻는 데에 실패한 것이고요.


조직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추진하는 변화는 
그 방향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언급한 H그룹 인사팀장님의 말씀을 약간 변형시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직을 바꾼다고? 조직에 먼저 적응한 뒤 그런 얘기를 해라.
조직의 변화를 추진하기 전에 그 원리를 먼저 이해해라.
처음 1년은 조직을 이해하고 적응하는데 노력해라.
그다음에 조직을 변화시켜도 늦지 않다.


10여 년 전에 H그룹 입사를 포기했던 저처럼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뜨악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웬 꼰대 소리'라고 하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상당 부분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새겨들으심이 어떨지... 


안 그러면 나중에 큰 코 다칩니다.



by 찰리브라운 (charliebrownkorea@gmail.com)





Key Takeaways


1. 경력직 입사자들은 조직이 비효율적,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사 초기에 조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2. 그러나 많은 경우 조직이 그렇게 운영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조직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변화를 추진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3. 따라서 조직의 변화를 추진하기 전에 먼저 그 원리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라. 그다음에 조직을 변화시켜도 늦지 않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감하시면 다른 분들도 공감하실 수 있도록 공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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