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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ghtme Apr 12. 2021

끝과 시작

[경증 우울증 극복기 여섯 번쩨] 하루하루의 소중함

 오래 다닐 것만 같았던 직장에서 퇴사했다. 그리고 안 좋은 편견을 갖고 있던 회사로 이직했다.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퇴사 절차를 거치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는 드디어 탈출한다는 해방감이 컸는데, 이번엔 회사에 애착이 컸기 때문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큰 불만이 없는 상황에서 결정한 이직이어서 그랬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만 같아 연락을 소홀히 했던 친한 직장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도, 덕담을 많이 들어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점점 실감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히 슬픈데, 정말 아쉬운데 마음이 찡하거나 우울한 감정이 들지 않아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낯설었다. 마지막 날, 팀원들과 인사하고, 퇴사를 알리는 전체 메일을 쓰고, 실장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는 데도 코끝이 찡하지도, 눈물이 찔끔하지도 않았다. 퇴사한 날 친구를 만났는데,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잘 놀았다. 이직할 회사에 100%의 확신은 없었는데도 그랬다.


 새로운 회사에 첫 출근 할 때도 떨리거나, 두렵거나, 걱정되는 마음은 없었다. 빨리 잘 적응 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업무를 익히는 과정에서도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현재 조직에서 나와 같은 직무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환경 설정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 고비만 잘 넘기면 금세 익숙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모순되게도 내가 걱정이 없는 점이 걱정됐다. 좋아하던 회사를 퇴사하면 슬프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면 긴장하는 게 당연한데, 나는 무척 태평했다. 혹시 감정이 무뎌진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학회를 다녀와 오랜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께 조심스레 이런 고민을 얘기했다. 선생님은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됐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예전보다 많이 호전된 게 보이며, 처음 병원을 방문했던 이유인 술 관련해서도 앞으로 조절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격려했다. 자신은 없었지만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분은 좋았다.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보니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병원에 가기 전, 경증 우울증인 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는 삶이 무료했다. 일상이 지루한 건 내가 무척 안정적인 생활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해서인지 전혀 삶이 따분하지 않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서, 근심이 많이 없어졌다.

 의욕도 생겨서 활기찬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한다. 코로나 상황과 재택근무로 인해 외출할 일이 거의 없지만, 매일 5천 걸음을 채우는 목표를 세웠고 아직은 잘 지키고 있다. 점심을 먹고 10분이라도 꼭 산책을 하는데, 따사로운 봄 햇볕을 느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기록하는 습관도 생겼다. 일기는 초등학교 이후로 써본 적이 없는데, 올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한 줄이라도 감상문을 적는 것도 시작했다. 기록이 쌓이는 걸 보니 뿌듯하다.

 아직도 나는 갈등 상황을 회피하고, 결정을 잘하지 못하고, 집중도 길게 하지 못한다. 이렇게 여전히 개선하고 싶은 점이 수없이 남았지만, 요즘 내 일상은 활기차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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