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엄마와 나.
5월 8일은 어버이날 입니다.
어버이날의 유래는 본래, 사순절의 첫날부터 넷째 주 일요일에 어버이의 영혼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영국·그리스의 풍습과, 1907년경 미국의 안나 자비스라는 여성이 본인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14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5월의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면서부터 정식 기념일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어머니가 생존한 사람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각종 집회를 열며,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풍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머니날을 모시다가 1973년 3월 어버이날로 지정된 뒤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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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배아파 출산하거나 마음으로 낳아 기르거나 어떤 가족의 형태와 관계 없이 자녀를 기르신 모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어린시절의 나라면 떠올랐을 아무개의 얼굴 대신 네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너에게 다른 사랑을 배우나보다. 감히, 차원이 다르다 말할 수 있는.
우리 부부는 음악듣기, 노래부르기 등등 유행가와 관련된 일들에 취미가 깊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대도시에 살 땐 정기적으로 노래방도 가곤 했다. 기분에, 그리고 맥주에 취해 한구절 부르다보면 우리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패기 넘치는 청년이기도 했다. 이제는 나의 소싯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대의 나는 학교 밴드의 보컬이었으며, 아르바이트로 라이브 클럽에서 꽤 긴 시간을 일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따로 팀을 꾸려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어린날의 나는 허세가 심한 편이어서 쉽게 어두워져 보이려고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말괄량이임을 드러내기도 했던 것 같다. 뭐 하나 최선을 다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않는 나는 이 일을 오래 하지 못하고 나와 버렸지만 그때 함께였던 사람들은 아직 같은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추억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그 이름을 오래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서른이 훌쩍 넘어 만난 나와 남편은 당연히(?) 서로가 첫사랑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아픈 과거가 있었기에 성숙한 연인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게 되었고, 예기치 못한 아기라는 존재는 그 결속력을 더 탄탄하게 해 주었다. --물론 아기로 인해 생기는 많은 책임들과 할 일 때문에 왕왕 싸우기는 합니다만 이제 두달여 밖에는 지나지 않았으니 조율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시간이 필요하지요. -- 하지만 초반의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때로는 유행가 가사에 과거의 자신을 끼워넣고는 했다. 이별 노래를 듣거나 부른다는 것은, 20대로 거슬러가 스스로의 상실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매우 적절했다. 시작하는 연인은 그렇게 수십수백의 가사에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하고, 과거의 연인을 떠나보내기도 하고, 더 젊었던 날의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행가는 사랑이야기였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사랑에 빠지거나 연인이 되거나 이별을 겪거나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했다. 그 밖의 주제는 많지 않았다. 마치 연인간의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것처럼 우리 노래들은 죄다 사랑 얘기였다.
근래 '뜨거운 싱어즈'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있다. 부쩍 서정적인 프로그램이 좋아지기도 했고, 임신 전 즐겨봤던 좀비, 고어물은 특유의 비명소리때문에 낮을 함께 보내는 아기가 있을 때는 보기 어렵다. 임신 기간동안에는 엄마가 즐거우면 그게 태교라는 마음으로, 유행하는 오징어게임에 DP까지 사실 죄다 섭렵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 아신전은 스킵했더랬지...-- 하지만 막상 출산 후에는 아기는 따로 잔잔한 노래를 틀어주고, 나는 아기가 잘 자는지 눈알을 돌려가며 이어폰을 끼고 좀비 드라마를 보다가 아기가 울면 이것도 끄고 저것도 끄고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어 반은 포기한 상태다. 그래도 마지막 끈을 놓은 것은 아니다. 킹덤 새 시즌이 나오면 꼭 볼 거다. —놓치지 않을거예요.
아무튼, 중견 노년의 배우들과 함께 합창단을 꾸려가는 스토리의 프로그램인 '뜨거운 싱어즈'에서 얼마전, 합창의 최소 단위인 듀엣 미션 하는 걸 지켜봤다. 나문희 선생이나 김영옥 선생이 무대에 오를때면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른다. 오래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는 노랫소리에만 담겨있지 않다. 그네들의 눈빛과 하얗게 쇤 단정한 머리 한올한올을 보고 있노라면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위로가 된다. 나머지 중견 배우들도 못지않다. 가수라는 직업이 곡을 완성하는 방법은 진솔한 연기로 곡을 풀어내는거구나 생각했었는데 연기자가 노래를 하니 파괴력이 엄청났다.
춤이 가미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팀도,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위해 한곡조 뽑아내는 것도 곱절로 돌려볼만큼 지루하지가 않았다. 때로는 박자도 놓쳐버리고 마는, 프로가 아닌 그네들의 공연은 음악적 완성도로만 평가받을 문제는 아니리라.
듀엣곡 중에는 어디선가 들어봤을법한 노래도 있었다. 팝송이었다.
나는 전혀 넉넉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경기도에 이사가기 전까지 단칸방에 셋이 올망졸망 잠을 잤다. 엄마의 혼수였다던 커다란 장롱이 방 절반을 차지하던 작은방. 그것보단 작은 화장대에서 뛰어내리며 놀다가 덧난 내 왼팔의 불주사 자욱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서울에도 냉난방이 되지 않고, 화장실은 공용을 써야하는 곳이 많았다. 연탄을 떼다 잠결에 세가족 모두가 가스를 마신적도 있었다. 그때 아빠는 실성한 채 소변을 보고 말았는데 나는 어린마음에 아빠가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나중에 그 실수가 아빠를 살린거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작은방에는 생쥐가 출몰하기 일쑤였고 쥐약은 상비약이었다. 일이층 전부해서 방이 총 여덟개였던 곳에 우린 일층 방두개를 전세내고 살고 있었다. 이층 방하나는 고대를 다녔던 것 같은 젊은 청년이, 다른 방은 무당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 방은 전부 비어있었다. 화장실은 각 층 복도 끝에 하나 씩, 공용이었다. 건물주가 무슨 취미였는지 빨간 불을 달아놓은 바람에 나는 졸지에 밤바다 눈물 바람이었다. 모태 크리스천인 엄마가 한번은 무당 아줌마와 차를 한잔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방음도 안되는 곳에서 울려퍼지는 방울소리와 온 건물에 퍼지는 향냄새때문에 이른바 층간소음 항의를 하려던 것이었단다. 막상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보니 무당이 그때의 엄마만큼 젊은 여자더란다.
그녀는 신병을 오래 앓아왔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지 않기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나중에는 교회엘 가 세례도 받고 안수기도까지도 받았다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갑자기 이유없이 애가 아프더란다. 큰병원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더니 한 스님인가가 신을 받아야 애가 낫는다고 했더란다. 결국 그녀는 애를 살리기 위해서 무당이 되었다고. 자신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니 이해해달라 했다고. 그리고 가족이 몹시도 그립지만 자신의 선택을 달가워하지 않아 혼자 살고 있노라고. 참 안타까운일이었다며 엄마는 집에 돌아와 조금 울었던것 같다.
이런 곳에 살며 우리를 부등켜안고 열심히 보릿고개를 넘어가면서도 아빠는 가족과 추억을 만들기위해 많은 애를 썼다. 내 할아버지는 무슨무슨 큰 양반집의 둘째아들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형이 노름빚으로 전재산을 탕진한 것을 황망해하며 술과 담배로 평생을 일도 하지 않고 보내셨다. 그와중에도 열심히 대를 이었는데, 장남이던 아빠는 아래로 세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까지 있었다. 아빠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홀로 서울에 상경해 공장이며 어디며 돈을 벌어야 했던 비운의 장남이었기때문에 자신이 결혼하면 딸이던 아들이던 하나만 낳아 잘 기르겠다고 다짐했었다한다. 그래서 아빠는 쌈짓돈이 생기면 어린 자신이 아버지와 미처 쌓지 못한 추억을 만들러 엄마랑 나를 데리고 어디로든 갔다. 차가 없던 우리는 셋째고모 식구들과 함께 다니다, 작은 티코를 마련한 뒤에는 셋이서도 왕왕 다니곤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간 이모가 살던 홍천엘 간다더니 일어나보니 동해바다였던 적도 있었다.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그나마 아빠가 모는 차는 편안히 탈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아는 노래가 나오더라. 뒷자석을 죄다 차지하고 잠들었던 어린 내가 들었던 그 팝송이.
Lying beside you Here in the dark. Feeling your heartbeat with mine. Softly you whisper You're so sincere. How could our love be so blind? ... ...And here you are By my side. So now I come to you With open arms. Nothing to hide Believe what I say. So here I am With open arms. Hoping you'll see What your love means to me Open arms.
[Open Arms]는 81년 발매된 JOURNEY라는 밴드의 [ESCAPE] 앨범 수록곡입니다. 가사 포스팅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당신 곁에 누워 있네요. 우리 심장이 뛰는 걸 느껴요. 부드러운 속삭임에 당신의 진심을 느껴요. 우린 어떻게 사랑에 눈 멀어 버렸을까요... ...당신이 여기 있네요. 내 곁에. 이제 난 두팔 벌리고 당신 곁으로 갈게요. 날 믿어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거예요. 내가 여기 있어요. 두 팔 벌리고. 당신의 사랑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면 해요. --후략
이 뻔한 사랑 노래가 다르게 들려왔다. 가슴 한켠이 뜨거워지는 걸 느낀다. 연애 꽤나 했던 내 이십대를 스쳐간 그들과의 인연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연인과의 이별이 온세상을 앗아간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아기를 갖고, 혹여나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해 하고, 천사 같이 잠든 아기에게 사랑을 속삭일때마다 이 거대한 것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하고 지나갈뻔한 나의 인생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각자 인생의 가치가 있는거라고 믿습니다. 저 또한 아기로 인한 행복을 얻는 대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아이 없는 삶을 택하신 분들의 인생이 안타깝다는 것은 아니니 노여워 마시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외쳤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자식이란 그런 존재였던 거구나. 연인은 결코 줄 수 없는 류의 사랑을 던지고 나에게 때로 등을 보이는 존재.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게 하는 존재. 어느 날 나를 외딴 행성으로 데려와 처음보는 것들을 향해 이끄는 존재.
나는 오늘도 젖병을 찹찹거리며 스르르 눈을 감는 아가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내자. 엄마가 너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단다. 항상 네 곁에 있어줄게. 하고.
지난 38년간 알지 못했던, 엄마가 되어 알게 된 위대한 사랑을 힘겹고 감사히 그리고 겸허히 받아들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