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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퇴사D-220]퇴사준비생의 하루

뭐든 하기 전이 제일 좋다

by 망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쳇바퀴같은 월급노예의 삶.

매달 25일에 맞던 월급 마약을 끊기로 결심하기엔 꼬박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마치 길었지만 가슴뛰지 않았던 오래된 연애를 끝내듯이 평생 충성을 맹세하겠노라 했던 회사와의 이별도 서서히 준비했다.



퇴사를 마음먹고 '퇴사준비생'으로 살아가는 하루는 훨씬 알차다.

우선 이제 다신 안 볼 사람들과 다신 쳐다도 보지 않을 일들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 바뀌었다. 200여일이면 이 곳에서의 마케터 경력은 끝날거니까 '좋은 게 좋은거다'라는 마음으로 대립되는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잘해주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원색이 옹졸한 사람인지라 싫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좋아질 수 없고, 마음속에 화는 불쑥 터져나왔다. 화가 날 때마다 마치 수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디데이도 세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연애가 1000일이 넘자 지운 디데이어플을 다시 깔아 핸드폰 첫 화면에 띄워놓고 회사가, 사람이 싫을 때마다 '해방의 날'이라고 적어둔 디데이를 보며 '그 날'을 기다린다.







퇴사준비생으로 산다는 건 꽤나 짜릿하게 알찬 하루를 맞이하는 삶이다.


우선 그동안 하겠다고 해놓고 '미래의 나'에게 던져놓은 일들을 하나둘씩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같은 일을 내리 5년동안 하면서 막내 한 번을 못 받아보고 심지어 자리도 입사했던 자리 그대로 앉아있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도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며 게으르게 미뤄둔 그 일들을 마무리해야 한다.

워낙에 '남이 보는 나'를 많이 신경쓰는 사람이라 후임으로 내 일을 하게 될 사람이 그 일을 '똥'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밀린 똥들을 치우고 있다.


"얘 뭐냐. 5년동안 뭐 한거야. 일은 이런 식으로 해놨어!"


이 회사에서 5년동안 보직 변화도 없이 이 일만 했는데 이런 말을 듣는 건 정말 최악이니까.




두 번째는 퇴사하면 누릴 수 없는 큰 회사 직원으로서의 권리는 모두 누려야 하기 때문에 빼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부지런히 찾아보고 있다. 정말 작은 거지만 예를들면

- 영어 교육비를 받기 위한 영어 공부를 신청

- 시험비를 회사에서 내줄 때 부지런히 봐놓으면 좋을 토익과 스피킹 시험을 보려면 또 공부를 해야하고

- 외부 교육비를 받으며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양질의 비싼 교육들을 신청하고

- 건강검진도 공짜일 때 받아놔야 하고

- 사내주식 매도방법을 미리 익혀두고 세금도 알아봐야 하고

- 신용이 좋을 때 할 수 있는 은행 업무들과 신용카드를 만들어 놓고




퇴사준비생이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시간도 분명 그리워질 때가 올 거다.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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