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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Apr 28. 2021

서른,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퇴사 전보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작가 하루키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내게도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흔 살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두려워 유럽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쓴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그를 세계적인 소설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30년이 지난 책을 읽으며 나도 하루키처럼 긴 여행을 다녀오면 무언가 몰두할 만한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이 들었다.

그 나이에 통과의례처럼 해내야 할 과업이 있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십대에 질리도록 공부를 해보고, 이십대에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도 마셔보고, 친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흑역사로 회자될 연애나 에피소드를 만드는 따위 말이다. 삼십대는 ‘이립(而立)’이라고도 한다니,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일에 정착해야 될 때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가 5년 넘게 했던 일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나의 서른에 만족했더라면 이 책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퇴사도, 세계여행도, 제주살이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유난히 서른을 걱정했다.


걱정의 연대기는 스무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는 스무 살부터 십 년 후를 걱정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같은 ‘서른 포비아(서른 살이 되면 큰일 날 것 같은 공포)’를 조장하는 책을 사서 읽었다. 심심하면 ‘서른이 되기 전까지 꼭 해야 할 일들’ 리스트를 쓰는 등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렸다. 놀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갖은 유난을 떨었다.

‘서른 공포증’은 이십대 중반이었던 직장인 1~2년 차에 정점을 찍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서른’에 대한 책을 광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새 책만 샀다면 가세가 기울었을 거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서른에 대한 책을 섭렵하자 이제는 ‘서른셋’ ‘서른다섯’으로 확장하는 어리석음을 발휘했다. 그렇게 모은 책은 서른 이후에 다시 중고서점으로 다시 팔아버렸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지구가 멸망하는지 초미의 관심사였던 해보다 2018년 내가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던 해가 더 긴장됐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지만 십 년을 준비해도 나의 서른은 그때껏 그려온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자차와 자가를 소유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입사 오 년이 지나도록 부하 직원 하나 없이 여전히 회식 장소를 예약해야 하는 막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서른이면 혼자서도 잘 하는 어른인 줄 알았는데, 운전도 잘 하지 못하며 옷에 김칫국물을 흘렸을 때 어떻게 빨아야 하는지 일일이 엄마에게 물어보는 애였다. 매년 갱신해야 하는 공인인증서도 할 때마다 애를 먹는 허당이었다. 출장의 소소한 낙인 항공사 마일리지도 적립하지 않은 헛똑똑이였다. 서른에는 드라마에서 보던 예쁜 정장에 힐을 신고 사무실을 또각또각 걸으며 해외 출장도 많이 가는 커리어우먼일 줄 알았건만, 현실은 달랐다. 발이 아파 힐은커녕 편안함을 위주로 고른 단화만 신었고, 정장은 면접 이후로 옷장에서 나온 적이 없다. 화장도 안 해서 기초 화장품을 제외하고는 2015년에 아이섀도를 구매한 게 마지막이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연차가 쌓일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경력이었다. 다른 일을 하기 두렵고 적응하기 귀찮아 한 직무만 오 년 넘게 했더니 이 일만 할 줄 아는 바보가 된 듯했다. 새로운 일과 사람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차단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적당히 일하고 그만큼의 돈을 벌며 현실에 안주해버렸다. 그렇게 스무 살부터 유난 떨며 그려온 모습과는 점점 괴리가 생겨갔다.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면 부지런히 안전지대에서 나와야 했지만 매몰되어버렸다.


이대로 마흔이 되면 큰일이었다.



이대로는 마흔에도 쉰에도 일상에 얽매인 채 나이만 먹을 것 같아 두려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의 하루는 비슷했고, 마감을 하고 나면 한 달이, 일 년이 똑같고 연차와 소정의 퇴직금만 쌓이는 인생. 그대로 있다가는 그 즈음에 달성해야 할 무언가를 놓친 채 이대로 불평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하루키처럼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조금 긴 여행을 떠난다면 그 시간이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물론 지금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던 일을 앞으로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예를 들면 월급날 근사한 곳에서 저녁 먹기, 법인카드로 (외근하고) 택시 타기 혹은 (야근 식대로) 공짜 밥 먹기 등. 나열하면서도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인지 기가 찬다. 회사 돈으로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아침부터 시간을 보낸 사람들과 저녁까지 함께 먹어야 했다. 회사 돈으로 택시를 탈 때도 지루한 외근 길이었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달콤한 현실을 영위하기에는 내 상태가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나의 마흔은 내가 한심해 마지않은 어른의 모습임이 자명했다.


퇴사를 하고 세계여행을 다녀온다고 해서 인생의 답은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극적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냥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니까, 북소리를 내는 그 북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봐오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백수가 되든 다시 월급의 노예가 되든 일단 지금 북소리를 찾아 떠나야겠다.
그렇게 오백일의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2030 회사원,
퇴사 후 자유로운 세계여행을 꿈꾸는 직장인,
디지털 노마드와 스타트업 창업을 꿈꾸고
행복한 반백수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직장생활과 퇴사 사이에서 불안해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퇴사 전보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출간됐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바로,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주말부터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응원 감사드리며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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