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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Oct 02. 2021

조기 은퇴한 파이어족을 본 후의 반성문

우리는 조기 은퇴자가 아닌 조기 '퇴사자'였을 뿐이었다.



타인의 시선에선 희극으로 보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일 수 있다. 내가 '커리어 우먼 병'에 걸렸던 것처럼 '해외취업 병' 역시 현실이 되면 멋있어 보이는 이면에 고충이 있을 것이다.
선망해 마지않는 미국 실리콘 밸리, 영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 일하는 밀레니얼 세대 중심으로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 생겼다.
주로 고소득, 고학력 출신의 근로자들이 40대 이전 조기퇴사를 목표로 극단적 절약을 하며 일을 하는 게 유행이란다.

<퇴사 전보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p167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회사로 꼽힌 직장을 그만두고 조기 은퇴를 선택한 사람들.

요즘 세상은 그들을 'FIRE족'이라 부른다.

올해 초 저 문장을 쓸 때만 해도 막연히 나도 파이어족인 줄 알았다. 어제까지도 그런 줄만 알았다.


지난주 <유퀴즈>에 나온 카카오, SK텔레콤, 삼성전자 서비스 기획자 출신의 '41세 조기 은퇴자' 인터뷰는 안이한 나에게 경종을 울렸다. 일 년의 공백 없이 촘촘하게 자금 계획을 세우고 퇴사, 세계여행, 그리고 은퇴까지 한 그들과 비교하면 내 상황은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16년의 경력으로 쌓인 연봉과 자가, 개인연금을 비롯한 노후 준비까지.

반면 여행 자금과 돌아와서의 생활비 정도까지만 계산하고, 퇴직금은 진즉 다 써버렸고, 집을 사지 못한 죄(?)로 남은 소정의 전세금과 조금의 투자, 노동 소득이 있다.


우선은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의 여러 개의 밥벌이를 만들어보자는 심산으로 회사에 돌아가지 않고 3년째 자유로운 신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처럼 빡세게 벌어 돈을 모아 두고 '은퇴'하는 대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하고 있다. 우리의 밭엔 아직 몇십 년 먹고살만큼의 수확물은 없다. 여러 가지 '일'의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있다. 금방 싹이 나서 열매가 달린 것도 있고, 아직 싹이 보이지 않거나 조금 고개를 내민 것들도 있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2 모작 3 모작' 개념을 처음 접했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하고 일 년 농사를 끝내는 한국과 달리 동남아시아에선 1년에 두 번 혹은 세 번까지도 쌀을 수확한다고. (중략)

일 년에 세 번이나 농사를 짓는다면, 태풍이나 장마가 휩쓸고 지나갈 때 허망하게 한 해 농사를 망치는 한국보다는 위험이 분산되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문득 아침 일찍 출근해 어두워지면 퇴근하던 여행 전 삶이 겹쳐졌다.


<퇴사 전보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p96


다만 아쉬운 점은 바로 열매를 따먹는 일들은 내가 투입한 시간만큼만 돈을 벌 수 있는 레버리지가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요가를 가르치거나 남편이 하는 과외, 학원 강의가 그런 경우다. 일용직 같달까? 그날 쓴 시간만큼 돈을 번다. 깔끔하고 좋긴 한데 레버리지가 없다.


반면 싹이 나길 기다리고 물을 주는 것들은 레버리지가 가능한 일들이다. 한번 시간을 들여 일해 두면 자고 있는 동안에도 돈이 벌리는 것들.

예컨대 월급 대신 지분을 받고 일하는 스타트업,

한번 상품을 잘 등록해두면 계속 판매가 이루어지는 온라인 셀러, 출간한 책,

한 번 제작해두면 계속 재생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등이 그렇다. (요즘은 경쟁이 치열해져서 덜하지만)




출처 <유퀴즈> 방송분 캡쳐



방송에 나온 인터뷰이(41세) 기준으로 계산한 은퇴 자금은 약 5억 원.

1. 매달 생활비 250만 원 x연금 수령 전까지 남은 년 수(12년) =4억

2. 세계여행 비용 1억

3. 국민 연금이 나오기 전까지 개인연금(플랜에 맞게 가입)

 -10년 생활비로 쓸 만한 액수를 퇴직+개인연금에 납입해 둔 상태(여기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진즉에 퇴직금 까먹은 우리로선 숙연해지는 부분이었다ㅎㅎ)

4. 만 65세 이후 국민연금 수령

5. 국민연금만으로는 부족하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저렴한 곳으로 이사 후, 주택연금으로 노년기 자금 마련(여기서도 자가가 없는 우리는 숙연해졌다ㅎㅎㅎ)


이 방송을 본 후, 우리의 상황을 조금 더 명료하게 보기 시작했다. 우린 조기 '은퇴자'대신 조기 '퇴자사'에 가깝다. 은퇴는커녕 당장 집을 사고 나면 빈털터리가 된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렇게 지내고싶은데



방송에서 언급된 그들의 일상과 비슷한 하루를 보내지만 사이사이에 일을 한다는 차이만 있다.

루틴이 없으면 마냥 게을러져 아침엔 7시 전에 기상, 커피를 내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천천히 마시고 나서 요가 수련을 다녀온다.

점심을 먹고 책을 읽고 그날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창밖은 어둑해진다.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캔 하며 넷플릭스를 보면 잘 시간. 거기에 더해 임보 중인 개를 하루에 3번씩 산책시키니 하루가 빠르다.


이렇게 여유로운 일상과 일을 병행하면서 그들처럼 은퇴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아니, 노후자금까진 아니더라도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집 한 채라도 마련할 수 있는 걸까?


남은 서른셋의 세 달은 지금보단 조금 더 부지런하게 조여야겠다고 반성한다.


임보중인 수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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