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기

[D-125] 퇴사한다고 말해버렸다.

예정보다 너무 이른 퇴사 통보

by 망샘


오늘도 지루함에 몸서리치던 사무실에서 '해방의날'이라고 적힌 디데이를 확인했다. D-125, 딱 4달남았다.

의리가 있으니 퇴사 통보는 2달 전쯤 하고 그 전까지는 진급하고 정리할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네 달이나 남은 오늘 퇴사한다고 말해버렸다.





한두 달 전부터 들려온 주니어 팀 로테이션 소문이 가시화되었고 조금 예상한대로 그 대상은 내가 되었다. 옮기게 될 뻔한 팀은 지금 팀보다 훨씬 크고 체계적이고 기회도 많다. 마음맞는 또래도 많아 훨씬 재밌는 회사 생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수인계하고 옮겨 일 배우면 두세달은 훌쩍 갈텐데 바로 그만두는 건 상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않은가. 내가 나가면 가뜩이나 사람 안 뽑아주는 회사에서 1명의 손실이 날테니 희대의 XX되는 건 시간문제. 내 커리어에 한 줄 넣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솔직하게 계획을 다 말했다.





퇴사한다고 말하면 엄청 후련하고 통쾌할 줄 알았는데 내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말을 하니 찝찝함이 남았다. 보통 퇴사 통보는 한 달전에 하고 준비하는데 네 달은 너무 이른 감이 없지않다. 이미 퇴사를 마음에 품고 오래 다닐 것처럼 연기하는 데 익숙해져서인지 내 연기가 들통난 것 같기도 해 얼굴도 화끈거린다. 오늘 회사에 가면 소문이 쫙 퍼져있을 수도 있겠다.


퇴사통보를 하고서는 팽팽 놀려고 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되버리니 노는 것도 눈치보이겠다. 게다가 이미 사장님이 승인한 승진 건도 누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이 타이밍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진급, 약간의 월급 상승, 회사 돈으로 영어시험보기...' 다 몇 푼 하지도 않는 돈때문에 마음이 찝찝하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다. 앞으로 남은 네 달여의 시간도 소중한 시간일텐데 쿨하게 마음먹어야겠다.


안되면 말고!


이번 일을 계기로 또 하나 느낀 점은 회사생활하며 '나만의 카드 패' 한 장씩은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만약 내가 퇴사 계획없이 팀 이동을 통보받았으면 그 충격이 꽤 컸을텐데 뒷통수 맞으려다 친 격이라 이 시점에선 매우 통쾌했다. 어디에서 무얼하든 지금 몸 담고 있는 곳이 아닌 차선책을 꼭 카드 패로 쥐고 있어야 하겠다.

그 카드가 조커일지 똥일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없는 것 보단 백 배 낫다.





이제 당분간은 이런 책을 읽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글로벌 커리어우먼을 꿈꿨던 나는 이렇게 잠시 직장생활을 쉬어가게 됐다.






퇴사한다고 커리어가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체적으로 그려나갈 모든 발자취들이 내 커리어가 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젠 크게 불안하지도 않다. 남은 네 달이 갑자기 남은 두 달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럼 뭐 어떤가. 좀 더 일찍 여행가지 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