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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D-60]나만빼고 다들 아는 퇴사소식

딴짓과 딴생각으로 버티는 시간들

by 망샘


초심을 잃은건지, 벌써 퇴사 디데이는 60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마지막 글을 쓴지 한 달이나 흘렀다. 돌이켜보면 열심히 글을 쓰던 때는 회사와 사람들에 대한 화가 가득찼을 때였다. 너무 화가 나는데 지루한 현실이 버텨내기 힘들어 글로 한풀이하듯 풀어냈었다.


반면 요 며칠간은 거의 일은 최소한으로만 내가 꼭 해야하는 일만 했고, 회사 자리에 앉아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있다. 슈퍼바이저의 보스가 요 며칠간 잦은 외근 및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덕에 내 보스 또한 회사에 붙어있질 않았다. 오 그렇단 말이지. 아저씨들이 놀면 저도 놀거예요. 이 아름다운 먹이사슬 순환관계.

111년만의 폭염이라 요즘은 회사에 에어어컨을 쐬러 오는 낙도 생겼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쌓일리가 있나.


퇴사자는 미사용 휴가에 대한 보상비도 받을 수 있지만 조금의 일도 하기 싫어 연차를 내고 주말을 붙여 내리 9일을 쉬었다. 곧 퇴사할건데 심지어 1박2일 워크샵을 가서 비즈니스 플랜 리뷰를 이틀에 걸쳐서 하는 진짜 '워크'샵까지 하고왔다. 이 워크샵을 떠날 사람인 나보고 준비하라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또 나갈 건데 하반기 비즈니스 플래닝을 하는 것도 참 자원낭비가 아닌가싶었다. 하지만 뼛속깊이 자리잡은 노예근성때문에 또 내 이름에 먹칠하기는 싫어 잘 준비했다.


'옛다. 내 마지막 선물이다.'

이런 느낌으로




보통 비즈니스플랜을 하면 마지막 페이지에 캘린더를 넣는다. '몇 월엔 이걸 하고, 12월까지는 이걸 끝내겠다'

하지만 내 캘린더는 9월에 끝나는걸. 그래서 결국 캘린더가 있던 슬라이드는 통으로 삭제해버렸다.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유종의 미를 거두기로 했고 아직 나의 퇴사 계획을 모르는 팀원이 반을 넘기에 막상 대충하려니 또 그러질 못하고 한땀 한땀 정성껏 발표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이 자료를 나중에 또다른 자료를 만들 때 써먹을 수 있게 마지막 선물준다 생각하고.




그렇게 불꽃같은 워크샵을 다녀온 후, 휴가까지 다녀오고나니까 이미 소문은 불같이 퍼져 옆 팀의 지방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내 퇴사소식을 알고 있었다. 재밌는 게 내게 아는체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다들 뒤로는 다 얘기했으면서 내 앞에서 아무런 내색하지않는 건 그들의 매너인걸까? 아니면 뻔뻔함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보는 사람마다 내 퇴사소식을 알리기 시작했고, 인사부와도 퇴사일에 대해 논의하며 소식을 알렸다. 모든 게 너무나 빠르다.


이렇게 모두가 내 퇴사소식을 알고있으면 홀가분하게 일도 안하고 마음껏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다. 오히려 모두가 더 나의 근태를 보는 것만 같고, 내가 풀어져서 놀면 유종의미 대신 그동안의 5년간 성실하게 일해온 시간도 부정당할 것 같다. 물론 남들은 그렇게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서도. 근무시간도 정확하게 지키고, 오히려 커피마시러 가지도 않고 자리에 오두커니 붙어 앉아있다. (에어컨이 시원해서, 자리에 앉아 몰래 딴 짓을 할 수 있어서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퇴밍아웃까지한 퇴사준비생의 시계는 빠르게 흐르고 있다. 이제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첫 직장에서의 시간이 이대로만 잘 끝났으면 좋겠다.


+하루라도 더 퇴사일을 당기고 싶지만 이놈의 회사는 정확하게 일한만큼만 마지막 달 월급을 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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