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룹원들을 모아놓고 제 퇴사를 통보하시다니요
바쁜 월요일 아침 출근 시간, 사장님 다음으로 높은 분인 본부장님께서 출근을 하자마자 칠십여명이 넘는 전 그룹원을 집합시켰다. 본사에 있는 직원뿐만 아니라 연구소와 지방에 있는 영업사원들까지 모두 컨퍼런스 콜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이 미팅에 대한 인비테이션이 지난주에 왔으니 당연히 다른 팀에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려나보다 싶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누군가 승진을 하거나 다른 팀으로 가게 되는 두 가지 상황이 생겼을 때다. 나의 퇴사는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한 달하고도 반이나 남았으니) 당연히 내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지각을 겨우 면한 시간에 도착했다.
땀을 식히기도 전에 미팅에 들어갔는데 왠걸, 내 퇴사 소식으로 포문을 여시는 본부장님. 아이고야...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해도 아직 전사적으로 퇴사소식을 밝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미 물은 엎질러져버렸다. 미팅룸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붙잡고 이것저것 캐물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몇 분들만 물어보셔서 후다닥 대답해드리고 화장실로 도망을 가서 마음을 추스렸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 자리 앞을 지나가는 분들도 또 한마디씩 던져주셨다. 네에, 여러분들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들 자기 할 일로 돌아가 소강상태가 되자 여러 생각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놀아도 되는데?!’
‘자리에 없어도 다들 그러려니하고 이제는 놀아도 괜찮을텐데?!’
하지만 노예근성이 뼛 속 깊이 박힌건지, 그간 일을 안해서 내가 안하면 안되는 일들이 쌓인건지 쉽사리 책상을 뜰 수가 없었다. 짜증나게 또 마지막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일이 왜 이렇게 집중이 잘되고 잘되는지. 인생사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얘기하기도 하고, 그 이야기가 쇠똥처럼 구르고 굴러서 와전되기도 한다.
내가 퇴사하는 표면적이자 가장 큰 이유는 ‘세계여행’이지만 왠지 마음의 준비없이 말하게 된 자리에서 내뱉기엔 머쓱한 단어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던 건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은 곳을 찾으려고 남편이랑 1년정도 돌아다녀보려고요’ 였다.
이게 사람들의 입을 거쳐 ‘이민을 가네’, ‘해외에서 사업을 하네’, ‘역시 돈이 많았네’까지 각색되어 있었다.
너무 웃겼다. 나도 내가 금수저이고 부자였으면 좋겠다. 정말로.
사실 진짜 퇴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직장을 그만둘 때 사람들이 다 물어보잖아요. 뭘 하려고 그만두느냐고. 그러면 일단 뭘 안 하려고 그만두는 거라고 말했거든요. 그 지점부터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뭘 해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기기도 하고.
<일상기술연구소, 제현주, p255>
직장생활이 일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때는 그 안에서 다른 것을 해보려는 에너지나 욕구가 잘 생기지 않아요.
일단 방향을 전환하려면 좀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발이 닿고 마음이 닿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세계여행을 할테지만 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이 때는 이걸 해야해, 이뤄내야해’라는 마음의 짐없이 훌훌 털고 가벼운 지갑과 가벼운 마음으로 여백을 가지고 싶다.
이렇게 말많았던 월요일이 지났다. 48일이 남았지만 나에겐 5번의 월요일만 남았을뿐이다.
시원섭섭하냐고? 아직은 시원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