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기

[D+6]아직은 실감이 나지않는 퇴사

장래희망을 찾았습니다. 평생 (돈 걱정 없는) 백수하고싶어요!

by 망샘


지난 금요일, 만 5년 3개월을 꼬박 다닌 회사를 나왔다.


대학생 때 인턴으로 4개월을 일했던 곳을 나온 건 퇴사 축에도 길 수 없으니 인생 첫 퇴사라 할 수 있다. 워낙 오래 전부터 퇴사를 마음먹었고 또 회사에도 퇴사 4개월 전부터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마지막에도 크게 신경쓸 일 없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퇴사하기 전까지 법인폰, 노트북 데이터들을 백업하고, 미처 인사하지 못한 분들에게 인사를 알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꽤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시켰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미리미리 했다면 좋았을 것을, 미루는 습관은 퇴사를 하는 날까지도 고쳐지지 않는구나. (심지어 지금 드라이브를 보니 그마저도 백업이 안된 파일들이 많다...)


그렇게 답답해하고 싫어했지만 끝에는 결국 정든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일 어떻게 될 지 모른다지만 현재로서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왠지 ‘잠시만 안녕’을 고한 느낌이다.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고 잠깐 연차를 낸 기분이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답답함을 많이 느꼈으면서 역시 마지막에는 좋은 기억으로만 미화된다는 게 이런걸까?



목동이



금요일에 모든 걸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3시.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온 기분이다. 해방감을 맛보고자 카페에 나가봤지만 여전히 오후 반차중인 직장인 같다. 주말에도 다르지 않았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려고 했지만 왠지 크리스마스를 맞은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에 눈이 일찍 떠진 주말은 여느 직장인의 주말처럼 지나갔다. 일요일 오후부터 더이상의 월요병이 없다는 사실에 전율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엔 ‘1주일 연차’를 낸 느낌이었다.


월요일에는 출근하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눈이 떠졌다. 일어나서 빠릿빠릿하게 준비를 하고 필라테스를 하러 나섰다. 이상하다. 이 시간에는 보통 월요일 8시에 출근하면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밀린 메일을 체크하다 팀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재미없는 업무 및 사생활 이야기로 담소를 나눈다. 그러다 뒤늦게 출근한 보스의 호출을 받으면 팀미팅이 시작된다. 작고 밀폐된 공간에서 답답한 와이셔츠를 입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다 큰 성인들이 한 사람의 독이 가득한 언어공격을 듣는다. '어쩜 저리 싫고 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를 다짐하며 다른 생각으로 지세우는 미팅 시간이 지난다. 쓸데없이 정신없고 바쁜 월요일 이 시간에 운동화에 레깅스를 입고 필라테스를 간다니. 곧 꺼질 버블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운동을 끝내고 나오니 미국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텔컨이 끝날 시간이었다. 법인폰을 반납하고 개인폰에 '개인' 일정만으로 캘린더를 정리했는데도 왜 내 머릿속에는 아직 회사 캘린더가 입력되어 있는지. 그 와중에 텔컨이 잘 끝났는지 궁금했다. 누가 보면 워커홀릭이었는 줄 알겠네.


그렇게 놀며 바쁘게 흘려보낸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 수요일로 갈수록 기상 시간은 점점 더 늦어져갔다. 공휴일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전율했고, 일부러 보란듯이 더 늦게 자고 느즈막히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사치'를 마음껏 부리고 있는 백수의 하루는 참으로 짧다.


직장인의 하루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한번도 이렇게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쉬어본 적이 없다. 운좋게도 재수를 하지 않고 수시 합격으로 대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생 때도 휴학은 했을지언정 취업도 졸업 전에 되어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 보통 취업이 확정되면 잠깐의 자유시간이 생기지만 내 경우는 목요일에 면접을 보고 바로 그 다음 주 월요일 출근이었기에 그조차의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보면 온전히 무소속으로 쉬는 시간은 지금이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이 생활이 너무나 달콤하고 꿈만 같고, 내 적성에 딱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찾아 헤맨 내 꿈은 바로 백수였던 것이다. 물론 돈 걱정 없는 백수. 원래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는가. 달콤한 백수의 하루는 오늘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고나면 왠지 연차가 끝나고 출근을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