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간 옷깃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10년은 훌쩍 넘은 친구는 나와 내신도, 모의고사도 비슷했던 터라 대학도 같은 곳엘 갔다. 금융공기업에 가겠다고 일찍이 필기 공부를 하고, 인턴을 하며 열심히 사는 그 친구의 모습이 멋있기도 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했다. 운 좋게도 졸업에 맞춰 취업을 하게 된 나는, 준비기간이 길어졌던 그 친구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랐다. 밥을 챙겨 먹이고, 자취방을 내어주고, 면접에서 떨어졌다며 늦은 밤 울며 전화하던 친구의 얘기를 몇 시간 동안 곧은 자세로 들어주기도 했다. 당시에 신입사원이었던터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들어주고 위로해 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친구는 원하는 유명 금융공기업에 합격했고, 나는 진심으로 함께 기뻐했다. 합격한 뒤로는 먼저 나를 찾지 않고, 내 연락에 잘 대꾸하지 않아 서운함이 커져가던 어느 날,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너 얼마 받아?” 얼마 정도 된다 하니, 돌아오는 말이 “나 정도 받네”였다. 몰라. 내가 속이 좁은 건지 꼬인 건지, 그 말이 나한테는 그렇게 상처가 되더라. 뉘앙스라는 게 있잖아, 나는 그때 ‘얘가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싶었다. 성적이 비슷했던 나를 고등학생 때부터 경계하던 친구(사실 얘가 나보다 잘해서 이해가 좀 안 됐다)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때의 앙금이 쌓여서인지 한참이 된 일인데도 결국 퇴사에 이르기까지 그 애 앞에서 회사에 대한 속사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던데, 정확히 그 반대로 한 마디 말로도 사람을 깊게 벨 수도 있더라.
가끔만 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 붙어 있으면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는데, 이상하게도 한동안 보지 않으면 은근 섭섭해지기도 한다. 고슴도치 이야기 같은 건가. 너무 멀리 떨어지면 추위를 이기기 어렵고, 그렇다고 가까이 붙자니 스스로를 지키고자 곤두 세운 가시로 서로를 찔러대는 그런 관계 말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가시를 드러내는 관계가 되는 것보단 적당히 거리를 두며 싸늘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수년, 수십 년 동안 관성적으로 굳어져 뻣뻣해진 각자의 결은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로 나와 결이 다른 사람과는 어떤 노력으로도 빈틈없이 맞물릴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이가 나의 결과 같을 리 만무하니, 이런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러니 타인을 관통하는 안목을, 다름을 받아들일 관대함을, 그리고 적당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갖추어야 한다. 말이야 쉽고, 일상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워 나도 항상 난관을 마주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흉내 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극적인 상황에서의 순간적인 태도에서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쳤을 때,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명부터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성공 소식에 축하한다는 말부터 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기 어린 눈빛을 흘기는 사람이 있다. 타인의 실수로 피해를 입었을 때, 상대의 당황스러움을 살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부터 내는 사람이 있다. 태도는 정적이며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므로,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의 테두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선 어떤 태도가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와의 fit을 짐작해보려거든 특정한 상황에서 나와 비슷한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되겠다.
관대함을 갖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에게도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인 이상 모두는 완벽할 수 없으니 상대의 사소한 단점들을 ‘단점’이 아니라 ‘다른 점’이라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다. 결이 다른 사람에겐 애초에 편견을 갖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 단점의 사소한 증거들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내게는 엄청난 단점으로 보이는 상대의 행동들이 제3자에게는 약간 거슬리는 정도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 나는 친구가 약속 시간에 조금씩 늦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데, 사과에 앞서 변명부터 늘어놓으면 화가 난다. 하지만 같이 있던 또다른 친구는 변명하는 것은 상관 없고, 약속 시간에 늦은 것에만 화가 난댄다. 각자 문제라 여기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은 ‘단점’이라는 게 명제가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는 반증이다.
끝으로,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을 때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 사실 기대가 시작되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에서부터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니 그에게 마음을 쏟고 애를 쓰게 된다. 이에 자연히 상대도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런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실망감도 따라오는 법이다. 마음 한 켠에 있던 실망감에 점령되기 시작하면 너른 마음도 점점 간장종지가 되기 일쑤고, 결말은 끝내 융통성 없는 사람이다. ‘기대하는 마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는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준 적도 없으면서 사랑 뒤에 살짝 숨겨둔 기대감을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했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는 실망감과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가 문제가 된다. 누군가를 위할 때는 반대급부를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좋아하는 상대에게도 해당하는 것인데, 결이 다른 사람에게도 예외가 될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