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mzam Jul 13. 2021

004. 감정불구의 맥시멀리스트

허영과 타인의 시선에 의존한 빈수레의 삶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주 요란해서 귀가 먹을 정도다.



본인의 취향이 아닌 그럴싸한 타인의 취향과 주류를 카피하고, 본인의 마음과 머리에서 나온 말이 아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타인의 말들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내뱉는 삶. 스스로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도 못한 감정이면서 마치 자신의 감정인 양 떠드는 꼴이 우습다. 꼴라주처럼, 피카소의 자화상처럼, 조화되지 않은 형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 예술이 아닌 단지 삶은 그저 지저분해 보일 뿐. 진정한 멋은 타인을 짓누를 무언갈 가진 사람들의 것이 아님을 깨달으려면 백발이 되고 난 다음이겠다.


필요에 의해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의해 감정을 연기하는 텅 비고 공허한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사람과 사람을 잇고 공백을 채우는 건 둘의 교류된 감정임에도, 이를 알 턱 없는 무지함에 주변인은 답답할 노릇이다. 물건이 됐건 사람이 됐건 변화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일상이 감정 없이 메말라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으므로 갖은 화려한 포장지들로 덧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이 하나가 다가와 포장지 안을 슬쩍 들여다 보기라도 하면, 노발대발할 것이다. 텅 빈 본래의 자신과 화려하게 보이길 원하는 허구의 상의 간극을 본인도 알고 있으니까. 감정불구의 맥시멀리스트는 영원히 가난할 것이다. 마음이 빈하므로. 조건 없이는 받아본 사랑이 없는지, 어린애 밥 먹이듯 입에 넣어줘도 씹고 삼키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로부터는 무엇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구멍 뚫린 항아리처럼 마음을 담아두질 못하니 그 공허함을 채울 방법을 알 수 없다.


맥시멀리스트는 그저 본인을 받아들여야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장점을 장점 그대로 사랑하고, 단점을 단점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으니 본인이든 타인이든 단점에다 현미경 들이 밀고 쳐다보면 그 많던 장점은 온 데 간데없이 사라진다. 모든 사람은 분명 미완성일 테니 네가 가진 비합리적인 나노의 기준에 따라 우열을 나누는 것을 관둬야 한다. 열등감도, 피해의식도 없이, 그저 현미경 free의 맨 눈으로 본 본래 크기만큼의 단점만을 받아들이면 된다. 상대의 사소한 단점을 찾는 것에 혈안이 돼, 상대를 평가절하 하거나 스스로의 우월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말 끝마다 꼬투리를 잡는 게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럴 때마다 난 제3자로서 그쪽의 표정을 봤으니.) 네가 가진 단점까지도 품을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이 있음을 진정 믿고,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네게도 올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보잘것없는 텅 빈 삶을 애써 화려히 감싸고돌면 영원히 그대로 머물 것이다. 채워주려는 누군가가 나타나거든 칼날 들이밀며 상대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 말아야 한다. 그 상대가 마지막일 수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금전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이 아닌, 그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닌, 그 사람 그대로를 아꼈다. 결과적으론 나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전혀 딴 판이었고, 더이상은 그를 아끼지 않게 되었지만. 거만함의 근본은 네가 네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에게 깊숙하게 뿌리내린 사람은 타인의 가치를 둘러볼 여력이 없다.


본인의 가치관을 재평가해본 이는, 죽음에 대해 숙고해본 이는, 그릇의 깊이부터 다르니 소박한 외줄타기에 능할 것이다. 부정과 긍정 그 무엇이든 한 극단에 치닫은 건 분명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프랑스 속담이 말하길, 그의 개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 개가 광견병에 걸렸다고 말하란다. 무고한 개는 미쳤다고 평가되고, 진정한 광인은 투사를 통해 면죄부를 얻는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본인은 그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비열한 속임수는 끝내 들키기 마련이다. 솔직함과 무례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개별의 인간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법을 이제야 깨우쳐야 한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안타깝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수용의 경험이 없으니, 진정한 사랑을 받아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고, 낯선 천국이 아닌 익숙한 지옥을 또다시 선택한다. 결국 선택한 지옥에서는 네 존재 자체가 사랑의 이유임을 스스로, 또, 반복적으로 부정한다.



최근 두어 달 동안, 당신을 주변인으로서 경험함으로써 지금까지 학교, 동아리, 회사 등 여러 조직에서 만나본 사람들 중 언행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왜 그러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고마울 정도로 제 시야는 많이 넓어졌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아주 많이 변했지요. 다행스럽게도 제 옆을 지켜주시고, 따뜻하게 어깨를 토닥이며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 있어, 오늘도 당신을 웃으며 넘겼습니다. 반드시!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요.

이전 04화 003.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