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mzam Sep 04. 2020

101. 쓸 데 없는 메타포

사이

초등학생 때, 우연한 계기로 썼던 동화 한 편이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했다. 그렇게 틈틈이 대형 신문사에서 신춘문예 작가를 선발할 때마다 시를 몇 편씩 써서 제출하곤 했고, 영락없이 매번 떨어졌다. 결코 업으로는 삼지 못할 정도의 애매한 재능은 취미로 남는 편이 낫고, 그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일 것이다.



여러 종류의 글 중에서도 내가 선호하는 것은 짧지만 그 안에 거대한 의미가 담긴 글이다. 단어 몇 개, 문장 몇 마디로도 가슴에 방망이질을 하는 글들이 있음에 놀란다. 그래서 한동안 쓸 데 없는 메타포에 꽂혔던 것 같다. 나만의 관심사에 과하게 몰입해 글과 현실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을 때에는 온갖 말들을 함축적으로, 압축적으로 담아 상대에게 보냈으니, 암호화된 내 말들이 제대로 해석될 리 없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손가락 아프게 꾹꾹 써 내린 편지를 구겨 던지면, 종이공에 맞은 상대는 그 안의 메시지를 읽기 전에 화부터 날 것이다. 내 딴에는 사랑한다 했건만 화를 내는 상대가 미울 것이고, 그렇게 오해가 쌓인다. 장난이든, 쿨함이든, 무언가로 포장된 마음을 내가 의도한 대로 해석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어릴 때는 사랑하는 누군가(여자든 남자든)에게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어려워 이런저런 메타포로 포장해댔다. 상대보다 마음이 무거운 내가, 시소 같은 이 상황에서 바닥을 딛고 관계를 지탱하는 게 싫어 애달픈 마음도, 애틋한 마음도, 그저 그런 마음인 것처럼 적당히 에둘러 표현했다. 끓는 마음은 그저 속만 태울뿐이고, 미지근해지고 나서야 끓다 못해 그을린 마음들을 먼지 털듯 하나하나 털어내며 관계를 끝냈다. 아마 나를 스쳤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사실은 내가 상대에게 지은 표정들도, 던진 말에 담긴 어투도, 쏟은 시간들도, 상대는 알아채지 못할 쓸 데 없는 메타포였을 뿐이다.


어느 날,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내 마음을 부담스러워할 상대를 위한 것인지, 상처 받기가 두려운 나를 위한 것인지, 혹시 모를 미래의 누군가를 위한 것인지. 그러다 문득, 누구를 위한 것이든 ‘그’ 말을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긴 채로 영원히 뱉지 못한 마음은 끝끝내 곪고,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끝난 뒤에야 터져 버린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스스로 다짐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습관을 고치려거든 일상을 통째로 바꿔야 하기 때문에 선언적인 글이라도 쓰면서 변화의 단초가 되길 바라며. 애틋한 마음을 중심으로 쓴 글이지만 사실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전 06화 새벽 네 시 십삼 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