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愛
덕수궁 돌담길을 애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더니, 그와 다시 시작한 연애 초반에 덕수궁 옆 와플집에서 크로플을 하나 사들고 돌담길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나눠 먹었던 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였을까. 차라리 그렇게라도 믿고 싶어 졌다. 운명처럼, 영화처럼 다시 만난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 마음 처참하게 무너지게 하곤 헤어지자고 할 거였으면 왜 다시 만나자고 했는지.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며, 너와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며, 네게 내가 필요하다며, 사랑한다며, 왜 그런 허울뿐인 말들을 해대서 네게 내 마음을 자꾸만 걸게 했는지. 너무 착하게만 굴려해서, 20대 초반도 아닌데 손잡자고 해서 싫었고, 자꾸만 표현해 달라고 해서 일부러 안 했다는 같잖은 핑계 따위의 말들의 폭격세례를 받으며 완패한 전쟁의 병사처럼 비참하게 차였다. 그냥 내가 지겨워진 거란 걸 잘 알아. 차라리 아예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아예 네가 내 인생에서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걸.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와의 제대로 된 마지막 데이트였던 합정의 그 카페에서 내 뒤로 그렇게나 많이 심어져 있던 선인장들을 내가 어떤 헛헛한 눈으로 봤을지 그는 알기나 할까.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걸 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어서, 그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날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 난 그를 내 눈에 하나하나 담으려 노력했단 걸 그는 알기나 할까.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을 이렇게, 저렇게, 비꼬던 그는, 5년 전 자신의 무기라 했던 sarcasm을 내게도 들이밀더라. 내가 네 적이라도 됐던 걸까. 도대체 내가 너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길래 그랬을까, 언제부터 내가 네 적이 됐던 걸까. 넌 왜 날 고작 그렇게 밖에 대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주 제한돼 있다고 생각해, 난 그저 예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거나, 제3의 적을 만들어 두거나, 입을 다물고만 있었던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대화와 관계. 가끔은 궁금해. 그는 내가 어떤 음식, 어떤 계절, 어떤 노래,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알기나 할까?
그와 헤어지기 두 달쯤 전부터 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내 어떤 말도, 내 어떤 행동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할 거란 걸 너무 잘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차마, 도저히 그 사람을 놓을 수 없어서, 매일을 울었다. 너는 믿지 않았고, 믿지 않겠지만, 나는 널 정말 순수하게 좋아했거든.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혼자 한강 벤치에 앉아, 또 언제는 회사 책상 앞에서, 자주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은 없는데, 나는 결코, 아무래도 그 사람을 놓을 수 없어서, 자주 술을 마셨다. 너는 믿지 않았고, 믿지 않겠지만, 나는 널 정말 순수하게 좋아했거든. 회사 근처에서 혼자 사케를, 회사 동기랑 고량주를, 또 언제는 대학 친구랑 와인을, 자주 마셨다.
마스크 덕분에 길바닥에서 누구도 개의치 않고 엉엉 울었다. 집에 들어가 현관 앞에서 쪼그려 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그렇게 많이 울어서 그런가, 헤어지고 나서는 거의 울지 않는다. 그때 그렇게 너무 애써서 그런가, 헤어지고 나서는 네 사랑은 필요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다. 그 사람들은 날 데리러 오고, 날 바래다주고, 소소한 선물을 챙겨주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내 얘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네 입에서 불리길 바랐던 내 이름을 참 쉽게도, 참 다정하게도 불러주더라. 서로 다른 네 명의 사람들에게 같은 날 시간 되느냐는 질문을 받아 봤을 정도로 과분히 사랑받고 있다. 사실 너에게서만 사랑받았어도 너무 충분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도, 돌이킬 생각도 없는 아주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언젠가는 네가 이 글을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참 고마웠고 미안했지만, 지겹게 얽힌 마음이 우겨지던 때 너무 속이 쓰렸기 때문에, 두 번 다신 너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와의 연애가 끝나갈 무렵에 내가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두 번 다시는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 했던 것처럼, 너와 헤어진 뒤로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날 궁금해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내가 그렇듯, 네 삶에서도 내가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ps. 2021년 10월 19일
이 글의 주인공과 헤어지고 한 번의 짧은 연애를 끝냈고, 지금은 반년째 잘 만나고 있는 애인이 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이때 그와의 연애에 왜 그렇게 애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재회했었기 때문에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끝이라는 생각에 더 공을 들였고, 그와 내가 운명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가 뱉은 말들을 지나치게 개인화했는데, 그의 표현법의 문제였을 수도, 내 심지가 굳지 않았던 게 문제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고, 상처 받았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마저도 지금의 내가 그를 완전히 내 삶에서 배제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년 여름, 그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도, 어느 미래엔가 그를 다시 만나고, 또다시 헤어졌을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 과정을 겪어서 다행이다. 그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상처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와의 이별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가지를 주었다. 첫째, 타인과 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둘째, 지금의 남자친구. 정말로 잘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