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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zam Oct 23. 2019

여운이 길었던 영화도 어쨌건 같은 결말을 반복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은 내가 가진 여러 습관들 중 하나다. 처음엔 주인공 A에 나를 대입해서, 다른 한 번은 상대역 B의 관점이나 제3자의 방관적 시각에서 여러 차례 영화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를 반복한 영화는 그것의 배경이나 대사 하나하나에도 집중할 수 있는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보는 영화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허나, 아무리 좋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한다 해도 결말은 언제나 같다. 영화를 소비하는 시점의 성숙도와 경험 등에 따라 결말에 다다르는 과정, 영화의 의미나 인물을 해석하는 형태가 달라질지는 몰라도 결국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2015 5 14일      *스포주의*


손에 꼽게 좋아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 무료한 하루들을 반복하던 조엘은 우연한 날의 우연한 일탈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이거 너무 뻔한 클리셰아닌가. 사랑이 시작되는 건 역시 반복된 일상이 아닌 특별한 하루인가 싶었다. 그러나 사랑을 기대하며 시작한, 의도된 하루가 그저 그런 하루가 되는 것을 참 많이도 겪었다. 그래, 특별하다는 게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너무 깊은 마음은 그로부터 빠져나올 때 조차도 깊은 공백을 남긴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와의 기억을 지운다.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클레멘타인에 배신감을 느낀 조엘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기억을 지우기 위해 라쿠나사를 찾는다. 삭제되어 가는 기억 속 그녀와의 세상에서 그는 지워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 세상은 영원으로 사라진다.


간혹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그 뒤에 따르는 그림자가 견딜 수 없이 어둡게 느껴지는 기억이 있다. 좋았던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와 같은 순간을 맞이하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찬란한 슬픔을 만들어 낸다.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과거의 아름다웠던 때를 그리워하느니 클레멘타인과 조엘처럼 아예 그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슬픔 또한 없다. 지금이 행복하다면 마지막 기쁨인 양 만끽하고, 불행하다면 마지막 슬픔인 양 안도하라.


모든 것이 시절인연일 것이다. 때가 되어 만난 인연이고, 때가 되어 헤어진 인연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에 과하게 빠져 살다 보면,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다. 비꼬아 생각하면,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겠지. 그럼 나는, 오는 인연은 특별하게 껴안고, 가는 인연은 대수롭지 않게 보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처음 이터널 선샤인을 봤을 때는 장면 전환이 많아서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헷갈렸다. 간혹 인물들의 감정을 누락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다가 그다음 씬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주인공들의 잔잔한 사랑과 그 사랑이 흩어지는 과정을 느꼈다. 그다음엔 클레멘타인의 짐작할 수 없는 통통 튀는 행동들과 그녀가 조엘의 기억을 지우려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잃은 과거의 두 남녀가 결국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는 결말은 같았다. 그니까, 미셸 공드리가 우리에겐 써준 결말은 같았다. 열린 결말의 묘미랄까. 엔딩은 항상 동일했지만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반복했던 매 순간 스스로 다른 엔딩을 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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