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2일
위로해주고 위로받고 그렇게 사는 게 삶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행복이 있고, 저마다의 슬픔이 있을테니 나의 행복으로 마음 아픈 상대를 다독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내 슬픔을 위로받으면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무겁더라.
그러나 이미 잘 아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고, 그것을 위한 내 노력의 결과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 했던 어른들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말갛던 마음은 그간의 상처들로 흉져버렸다. 가끔은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들의 속 조차, 말 조차, 알 수가 없고, 내 패를 모두 내보인 그들에게 그 패들로 두들겨 맞았다. 두 번은 없을 것만 같던 사랑이 하루아침에 다른 이에게 떠나는 걸 보며 우울의 홍수 속에서 수개월 간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내가 거는 마음의 무게가 더 무거웠던 탓인지 나는 자꾸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차례, 굳은살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내가 꿈꿔온 관계가 있기나 할는지 의심을 거듭했고, 나조차도 그런 관계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되었다. 적당한 사람이 되어 적당히 마음 주고, 그쪽도 적당히만 알아가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다. 염세적인 생각이 극에 달한 순간엔, 결혼이라는 게 어느 누구의 속도 알 수 없으니 법적으로, 서류상으로, 구태여 번거로운 작업들을 거쳐 도장 꽝 찍고 관계를 증명하는 수단은 아닌가 싶었다. 요즘에야 헤어짐이 예전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만, 결혼이 사랑, 또는 모두에게 약속한 의리, 그 중간 어디쯤의 것으로, 이 위태로운 관계들 속에서 편히 쉬기 위한 상징적 의미일 것이라 생각됐다.
적당한 사람이 되고 나니 웬만한 관계가 훨씬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누군가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니 쉽게 설레지 않았고, 상대가 떠나갈 때의 아쉬움 또한 아주 가볍고, 짧게 스칠 뿐이었다.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간혹의 인연들을 마주할 때엔 적당한 마음만 쓰겠다는 나의 다짐이 마구 흔들렸다. 네 기쁨을 기쁨 그대로, 슬픔은 슬픔 그대로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껴안아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더 아껴주고 싶고, 더 안아주고 싶고, 그들의 인생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이제는 그런 사람이 내게 올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프게도 조심스러움만 커질 따름이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힘껏 마음 주는 사람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을 거라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닳지 않는 마음이니 마음껏 쓰고, 마음껏 주면서, 더 잘해주지 못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뜨겁게 데운 욕조에 딛는 첫 발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발을 담그다 보면 이내 그 따뜻함에 온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