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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Mar 31. 2022

플라토니안의 험프 데이

영원으로의 출퇴근 - 2화

출근, 2019년 6월 26일 수요일 7:51 AM ~ 8:59 AM


이틀 전 월요일의 첫 출근 때 비에 젖은 장비들을 제대로 말리지 못해 화요일을 쉬고, 험프 데이(hump day)인 오늘 수요일에 다시 자전거를 실었다. 예정에 있던 수요일 아침 회의 일정이 오후로 바뀌어서 가능했다.


북미 샐러리맨들은 수요일을 봉우리의 꼭대기 (hump)로 표현한다. 60년대 이후 정착한 주 5일 근무 문화 속에서 월요일과 화요일의 오르막과 목요일과 금요일의 주말을 향한 슬라이딩 내리막의 중간에 있는 수요일을, 말 그대로 한주에 넘어야 할 산의 꼭대기로 보는 것이다.


주말의 공백이 주는 reset 효과는 매주 일정한 반복 업무들의 효율을 상승과 하강의 패턴을 갖게 해 준다. 이런 관찰의 일반화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꼼꼼한 미국인들 중엔 자동차나 고가의 제품을 구입 시에 스티커의 제조일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가장 피해야 할 제조일은 월요일과 금요일이고 화/수/목요일에 제조된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화요일에 만들진 제품을 선호하고 금요일에 만들어진 제품을 회피한다. 자동차의 경우에는 문 옆의 스티커를 살펴보면 제조일과 공장의 정보를 찾을 수도 있다.


프로젝트나 테스크도 처음 시작할 때는 전체 어젠다의 명분이나 철학에 주목하게 되고, 디테일을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프로젝트 초반에, 미지의 완성 패키지에 대한 궁금함이 자극하는 의욕은 커다란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의욕은 변화가 적은 저주파 성분의 굵직한 방향성들에 튜닝되기 때문에 디테일의 다채로운 고주파 성분들은 상대적으로 감쇄(attenuation)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초반의 동기부여 의욕을 절제하며, 디테일의 유혹에 붙잡혀 일찌감치 devile's advocate이 되는 것 또한, 방향성을 상실하거나 애초에 고려하던 목표에서 빗나가고, 때론 그 실수를 합리화하려는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속도의 제어를 위한 프로펠러의 RPM 모델과 효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항로의 트레젝토리 에러 수정치의 임계점을 요구된 기준치에서 초과하는 경우도 그런 예이다. 운전을 하며 지나치게 도로 속도제한에 집착을 하다가 목적지까지의 최단 경로를 놓치는 경우의 아날로지라 하겠다.


오늘 오후의 회의는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 디자인이 고려하지 못한 상황의 극복 (contigency plan)에 대한 브레인스토밍이 있었다. 프로젝트 초기에, 가능한 모든 에러를 방지하려는 디자인과 에러를 필연의 요소로 전제한 디자인은 전형적인 극단의 두 가지 접근 경우들이라 하겠다. 전자는 오버헤드가 유지비용보다 비싸고  후자는 유지비용이 오버헤드를 압도한다. 하이브리드적 접근은 다양한 입장들의 의견들을 수렴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의 결정 논리는 수학보단 철학적이고 때론 팽팽한 입장들의 대립은 정치적이고 서사적이기까지 하다. 프로페셔널들이라면 타부처럼 배제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논리의 근간과 독립된 변수이기 때문에 피해야 하고, 개입되면 완성 후에 재앙적 대형사고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엔지니어에게 감정은 꺼내기엔 가격이 싸지만, 책임을 지기엔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 업무 관련 월요일 단상들의 변화를 떠올려 본다. 초기엔 완벽주의의 환상이 이끄는 넘치던 의욕들을 소중히 여겼었다. 차츰 에러를 존재적 현실로 받아들이며, 화려하지 않지만 유지비용이 적고, 현실 응이 간편한 디자인에 매력을 갖게 된다. 경험에 의한 인식의 변화라기 보단,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견고한 모쥴라 디자인들에 누적된 단단함(robustness)들이 창출하는 최종 패키지의 성능이 미학적 감동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초반에 큰 오버헤드를 요구하는 디자인은 21세기 개발 문화에서는 리스크도 크고 마켓의 전략으로도 맞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완 패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알파 버전을 출시한다고 생각해보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월요일 아침엔 금요일을 향한 힘찬 의욕을 소분하여, 나머지 4일에 비대칭의 현실 적응 패턴(adaptation mode)으로 배분하는 전략을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금요일의 마무리를 결정하는 것은 월요일의 서사적 어젠다가 아니라, 수요일까지 흘려놓은 착오들을 목요일 퇴근길에 갈무리하는 단상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주 7일의 문화가 정착되었는진 모르겠지만, 현대 직장인들의 업적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투쟁의 상승과 하강의 반복들이 피워낸 문명의 꽃들이다. 우리는 잠시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 꽃들의 인문적 미학과 예술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사이클에 적응되어 있다.


직장인들이 주말을 위해 사는 것은, 단순한 목적지향성이라기보단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가치 창조 과정을 즐기기 위한 천재적인 자기 최면의 꼼수 같다.




퇴근, 2019년 6월 26일 수요일 5:08 PM ~ 6:19 PM


오늘 아침의 멘탈은 현실적이고 도전적이며 효율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주로 12시 방향에 시야를 고정하고 근력의 한계를 넘나드는 페달질에 지각을 집중했다.  저녁의 퇴근 라이딩 중엔 파장하는 장터에서 본전을 챙기려는 마음으로 불특정의 모호한 위로를 찾았던 것 같다.


아침이 관계들에게로 달려가며 마음을 조이는 시간이었다면, 퇴근은 관계들로부터 벗어나며(away from) 조였던 마음의 끈들을 풀어놓으려는 찰나들의 간헐적 반복이다.


온종일 이데아를 동경하던 인식론자의 옷을 벗고, 퇴근길 토우패스의 녹색 숲 속에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낀다.


오늘 하루의 현실적 가치 정산은 프로젝트의 진전을 유지했고, 귀중한 실수들을 경험하며 새로운 시도를 해 볼 내일의 가격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가치는 한낮의 모든 논리들이 만든 편견의 허상들을 해체하고 싶은, 작지만 후련한 충동들을 잠깐씩 느껴보는 것이다.


자전거를 달리며 허벅지에서 올려 보내는 통증의 신호를 노이즈로 처리하는데 소모되는 시간은 약 15분이다. 60분의 퇴근길 라이딩 중 첫 1/4을 육체와 정신의 merging에 지출하고 나면, 숲이 느껴지고 함께하는 존재의 교감 채널이 열린다. 이때부터 무의식의 유영이 시작된다. 시쳇말로 멍 때리는 순간이 이렇게 획득되는 것이다.


숲으로부터 경험한 존재적 느낌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억지로 분석하고 정돈하여 문장을 만드는 순간 그 찰나의 느낌들의 99퍼센트 이상은 증발해버린다. 오직 언어가 붙잡은 제한된 상징성이 다시 문자라는 기표로 truncate 되며 실체가 낭비된다. 정작 나 자신도 스스로 끌어낸 기표의 제한된 시니피에에 스스로 최면에 빠지기 때문이다.


원초적 딜레마는, 붙잡으려 하면 증발해버리고, 내버려 두면 맴돌며 다시 붙잡고 싶은 욕망을 자극받는다. 숲의 나무들이나 사슴들은 표현을 배설하고 싶은 인식론자의 욕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표현 욕망이 순연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도메인에선 왜곡되고 창작된 허상들과 희비의 딜레마가 또 다른 실체들이다. 더 커다란 하늘 아래선 이 인식론자의 구별심 또한 기타 존재들 속의 subset이다.


한낮 플라톤의 합리주의 숭배와 해 질 녘 그 숭배의 부정과 해체는 구속과 해방의 절묘한 반복에 리듬을 느껴보는 순연한 경험이다. 


나의 토우패스 45분 라이딩 구간에선 부정도 긍정도 그 분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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