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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Jan 13. 2023

'오류'에 대한 잡념

현재의 불완전성 너머의 절대성을 존재적으로 믿는 것은, 페러노이드의 환각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절대성을 종교적 도그마의 궁극으로 본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저항할 것이다)


불완전함은 그 자체로 완전한 그 무엇을 동시에 던져준다. 오류는 대자적 안티오류의 추진체인 동시에 안티오류는 그 존재 자체가 오류이며 실재가 아니다.


오류는 상징계의 관찰 그리고 궁극의 비교의 연산값으로써의 상대성들로부터 도출된, 일관성을 보증할 수 없는 (-라깡) 명백(tangible)하지도, 정적(定的:deterministic)이지도 않은 상징계의 sub-domain 객체 일뿐이다.


이런 대척성의 동시 발현의 작동 기제를 더 들여다보자.


늘 진노랑에 갈색 반점 없는 완벽한 바나나를 먹고 싶던 내 앞의 과일 좌판에는, 너무 익어 반점 투성이나 설익은 초록색 바나나들만 눈에 뜨인다.


나의 먹음직스러운 바나나의 환상은 그렇지 못한 바나나들(오류 투성이)을 선택적 휠터로 통과되고 증폭되어 현현한다.


완벽하게 노란 바나나도, 녹익었거나 설익은 바나나들도 좌판 앞에 서서 바나나를 골라야만 하는 순간 도출하는, 비교 연산 공간의 기저 벡터들의 상징들이다. 그리고 이원적 양극은 정량적이지 않지만, 정성적인 오류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암시를 나는 실재계로 연결되는 불안한 출렁다리로 표현하고 싶다. 불안감은 상징계에 휘몰아치는 거친 맹목적 신념의 돌풍들 때문이다.


라깡이 언급한 일관성은 오류의 정량적 부분이며, 오류 존재여부의 진실성은 실재계로 넘어간다.


헤겔을 다시 뒤져보면, 테제와 안티테제 그리고 그 변증연산의 최종 로컬 도출값인 진테제는 모두 상징계 도메인에서 발생한다. 테제에는 a priori로 오류가 묻어 있다. 이 오류는 안티테제와 진테제의 연산과정 전반에 '강도'를 달리 할 뿐 분명히 존재하며 흐르고 있다. 지젝은 이 모순의 보존성을 언급한다.


여기서 '강도'는 실재계와 연결된 출렁다리의 흔들림과 상징계와의 상대적 거리(이것은  또 다른 긴 이야기라 여기선 생략)에 따른 것으로 본다.


상징계의 보편성은 오류의 '강도'를 에너지 밀도가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하는 그레디안트에 관여한다. (상징계의 측정값인 엔트로피보단 에너지 밀도가 더 실재계를 포함한다. 오류치와 엔트로피의 함수관계는 상징계의 관찰이다.)


헤겔의 연산 공간에서 실재, 즉 존재론적 관찰은 오류의 동시적 내포성이다. 그리고 이 오류의 흐름은 인식 과정의 동기들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오류는 상징적 보편성들(민주주의, 롤스의 정의론, 공학의 최적이론 등)에 의해 수렴적 소멸을 겪는 듯 하지만 존재론적 불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실재계에서 뻗쳐오는 오류의 장(場: field)이 의식의 인식과정을 drive 하기 때문이다.


전기모터의 아날로지로 본다면, 전자기장(실재계)에서 전기입자(charged particle, 주체)가 로렌즈의 힘에 의해 궤적들(상징계)을 만든다.


인식의 주체로서 우리의 '오류'들을 사유해 보자.

나는 무엇을 상징하며 어떡해 그것들을 인식하는가. 우리가 끔찍하게 혐오하게 구조된 '오류'가 경이롭게도 바로 존재의 driver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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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The Music Center at Strathmore

North Bethesda, Mar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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