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 단상
타자나 타자들을 위한 자신의 계몽적 욕망은 외로운 싸움이다.
그 타자가 하나의 집단일 때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는 부분적 객체들이나 기타의 집단들에게 공감의 확산을 기대한다. 공감들이 바이러스처럼 복제되어 더 많은 군중들에게 퍼지길 바라는 욕망을 계몽 본능으로 이해해본다. 사람이나 고래들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교육을 생존의 도구로 활용하는 일부 감성이 뚜렷한 포유류들에게 나타나는 관찰이다.
그리고 교육은 진화한다. 더 학습 같지 않은 형식으로 위장되며, 더 효과적으로 계몽 본능을 생존의 화두와 접목시킨다. 소집단이 다른 무리의 소집단들의 생존의 어젠다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자신들의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복제한다. 객체적 디테일이 없으며 의지의 에너지 밀도가 낮다.
타자가 집단이 아니고, 하나의 객체일 때, 그리고 절대 생존이 아닌 유도된 의식의 관념적 생존의 본능일 때, 이것은 더 이상 계몽이 아니라 집착이 된다. 정확히는 계몽의 형식을 빌린 집착이다. 집착의 어젠다는 두 개의 독립된 객체들의 관념들을 하나의 폐쇄적인 주관적 관념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소극적이지만 융합적이며, 디테일에 반응하여 진보하며, 의지의 에너지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인식과 측정이 가능한 힐버트 공간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포유류의 계몽 본능 현상들에게 오늘은 ‘사랑’이란 기표를 달아본다.
우리들의 관념 속에 꿈틀 되는 계몽 본능들은 집단이나 타자를 위한 생존 본능에서 진화한 정의로운 공리적 이상인가? 아니면 퇴화한 관종의 나르시즘인가?
집단을 사랑하는 이유가 절대 생존의 확장으로써의 투쟁이라면, 한 타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의 관계적 존재를 확장하는 투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쟁..!
얼마나 긴박하고 파괴적인 존재의 생존 방식인가?
엔트로피로 관찰하는 세상에는 풀지 않고 내버려 두어야 하는 문제들도 많다.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 진보적 이성이 항상 최적의 투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은 인식과 의식의 인과적 관계를 끝없이 파괴할 수 있는 존재다.
계몽하지 말고 사랑해보자
인식하지 말고 사랑해보자
의식하지 말고 사랑해보자
인생은 제로섬의 회로에 얹힌 ‘삶’이라는 에너지 현상들이다.
굳이 예측하고, 측정하여 최적의 모래성을 쌓아도, 저항을 겪으며 에너지가 소진될 즈음에는 누군가 리셋 버튼을 누를 것이다.
계몽적으로 투쟁을 해도,
사랑으로 융합을 해도,
어차피 끝은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