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은 17코스부터
예상했던대로 4월초의 바닷 바람은 만만치 않은 냉기를 품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경량 패딩과 마스크가 있었다. 덕분에 차가운 바람을 철벽 방어하며 바닷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그날 처음 가 본 올레 17길은 이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올레길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곳이 다 있을까.
17코스는 걸어도 걸어도 바다가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온통 푸른빛이어서 바다가 길을 안내해주는 느낌이었다. '아! 나 진짜 제주도에 사는게 맞구나! ' 집에서 겨우 20여분 왔을 뿐인데 바다가 이토록 흔한 풍경이라니! 솔직히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과 들뜬 설레임을 동시에 느끼며 힘든 줄도 모르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경치에 취해 홀린 듯 걷는 나와 달리 딸은 초반에는 "바다다!"하고 좋아하더니 곧 비슷비슷한 광경에 시큰둥해 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저러다가 그만 걷는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슬슬 올라올 때 쯤 커다란 빨간 큰 목마상이 눈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인 이호테우에 도착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딸은 모래사장을 보더니 기분이 좋아져서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이 곳에서 다시 활력을 찾은 딸은 기세좋게 도두항을 지나 갔는데, 평탄한 항구를 지나 도두봉을 오르기 시작하자 다시 숨소리와 함께 눈빛도 거칠게 변해갔다.
"떡볶이집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어쩌지? 택시 탈까?"
라고 슬쩍 말해보았는데, 나름대로 오기가 발동했는지 딸은 이미 땀범벅이 된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고 씩씩하게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대견한지 관덕정 분식의 모든 메뉴를 모두 주문해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와! 비행기다! 공항이 보이네!"
나보다 먼저 도두봉 정상에 오른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항이라고? 나도 서둘러 정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니 우와! 도두봉은 말 그대로 공항뷰 명당이었다. 17코스는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올레길이다보니 도심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른 코스들보다 숲길은 적지만, 그 대신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올레길 중 유일하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도두봉은 20분 안에 오를 수 있는 작은 언덕이니 혹시 이 곳을 가게 된다면 오르막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바다와 공항뷰를 꼭 보기를 권한다.
도두봉을 넘어서 내려가니 관광객들의 사진 명소인 무지개 해안도로가 바로 이어졌다. 이후 혼자서 17코스를 걸을 때마다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정말 너무 위험해 보이는 순간을 여러 번 보았다. 보통 한 명은 무지개색 표지석이 올라가고 일행이 차도를 건너가서 그 모습을 찍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사진이 잘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정말 말 그대로 차도 위에 서서 찍는 것이기에 지켜보는 내가 조마조마했다. 부디 자신과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런 행동은 삼가해 주면 정말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딸과 갔던 4월 초에는 코로나로 제주도 관광객이 거의 없을 때여서 무지개 도로도 한산하기만 했다. 딸에게 사진 찍어 줄까? 했더니 그 사이 지친 딸은 사진은 싫고, 음료수를 사 달라고 했다. 초등학생이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 해도 참 기특해서 이제 쉬고 택시타고 분식집으로 가야 겠다고 마음먹고 그 전에 당 충전을 먼저 하기 위해 마침 바로 앞에 있는, 요식업계의 거물이 하는 베이커리 카페로 들어갔다.
그 곳은 주차장이 협소해서 차를 가져가면 불편하지만 바로 바다 앞에 있기에 오션뷰를 즐기며 달달한 빵과 음료를 즐기기에는 꽤 괜찮다. 특히 우리 같은 올레길 순례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에너지 충전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딸은 주스와 앙버터,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한 숨 돌리고나니 그제서야 발과 종아리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아이도 걸을 때는 몰랐던 피로감히 확 느껴지는지 들어오기 전보다 더 시들시들해졌다.
"지금까지 진짜 잘했어. 너무 멋졌어, 우리 딸. 엄마가 택시 부를게."
"택시? 왜?"
"분식집 가려고. 너 떡볶이 먹어야지."
"아니, 나 더 걸을 건데?"
오잉? 조금 전까지 완전히 지쳐서 빵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진짜 더 걷겠다고? 진심으로 놀란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딸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조금 더 걷다가 힘들면 택시 불러 달라고 할게."
"진짜? 정말 걸을 수 있어? 무리하지 마. 내일 다리 아플 수도 있어."
"아니야, 걸어가서 떡볶이 먹기로 했잖아."
우와...언제 이렇게 컸을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딸은 벌써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한 뼘 넘게 성장하고 있었다. 부모가 되고 아이를 키우며 여러 번 느끼지만, 정말 아이들은 언제나 엄마보다 한 발 앞서 자라고 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김없이 나의 예측범위를 벗어나 더 깊고, 높게 성장한다.
그 올레 17코스에서 딸에 대한 나의 예감은 기분좋게 빗나갔다. 딸은 결국 그 곳을 나선 후 더 걷고 걸었고, 중간 중간 짜증과 힘듦을 토로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용두암을 지나고 시내로 들어선 후 결국 관덕정 분식까지, 우리의 목적지까지 13.9km를 모두 걸었다.
그 날, 딸은 다른 어느 때보다 떡볶이와 한치 튀김을 몇 배는 더 맛있게 먹었다. 나도 그날의 그 떡볶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이날은 딸에 대한 고마움과 올레길이 준 다채로운 감정과 느낌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딸과 단 둘이서 만든 우리만의 추억으로 오래 오래 기억될 순간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