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 본 올레길들
제주살이를 시작하며 모든 올레길을 걸어보겠다고 결심했지만 현실에 치여 살다보니 아쉽게도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틈 날 때마다 찾아가고, 걷고, 느끼고 왔기에 부족하나마 나에게 좋았던 올레길과 그 경험을 공유해보려 한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동안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들렀던 곳까지 다 포함하면, 추자도나 우도 같은 섬을 제외한 대부분의 올레길을 잠깐이라도 걸어봤지만 그런 곳은 '제대로' 걸었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므로 코스를 따라 계획을 잡고 가 본 올레길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내가 걷기로 작정하고 가 본 올레길은 7코스, 10코스, 10-1코스(가파도), 14코스, 15코스, 16코스, 17코스, 18코스, 20코스이다. 이 중 16코스와 17코스는 여러 번 걸었고(특히 17코스는 수시로 갔던 곳이다), 18코스의 일부 구간도 집에서 멀지 않아 자주 찾았다.
이 중 10코스인 송악산 둘레길은 지인들이 놀러올 때마다 안내하는 '우리집 투어'에 포함된 곳이어서 가족 모두가 10번도 넘게 갔다. 얼마나 자주 갔으면 딸이 지인들에게 처음 가 본 사람들은 한 번에 찾기 힘든, 주차장 근처의 화장실 위치도 알려주고, 송악산을 걸을 때에는 오르막이 아직 남아 있네, 이제부터는 계단이 쭉 이어지네 등 앞선 코스를 안내해 줄 정도였다.
우리가 이처럼 송악산 둘레길을 열심히 소개하고 찾은 이유는 눈으로 바다를 담고, 몸으로는 그 바람을 느끼고, 동시에 제주의 초록초록한 자연까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제주의 매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다와 제주의 숲과 바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송악산 둘레길은 그리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다.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초입은 완만한 오르막이어서 걸을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오르막이 꽤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는 것. 평소 잘 걷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 끝나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날 정도로 오르막에 오르막이 더해지는데 그러다가 이제 내리막인가? 싶을 때쯤 나무들 사이로 길게 뻗은 나무 계단이 나타난다.
그래도 산으로 들어가면 나무 그늘 덕분에 시원해서 잠시라도 땀을 식힐 수가 있다. 입구에서 숲길까지 이어지는 바다 쪽 오르막은 그늘이 전혀 없어서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가야 하므로 아무리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와도 더운 여름날이나 기온이 높은 때에는 순식간에 온 몸이 땀으로 푹 젖어 버린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걸어야 함에도 송악산은 나를 부르고, 또 불렀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해 찾고, 또 찾았다. 육지로 돌아온 지금도 송악산 둘레길을 걷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 정도로 정이 제대로 듬뿍 들었다.
그럼 도대체 이 길은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처럼 내가 홀딱 반한 것일까?
이 코스는 초입부터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반겨준다. 날이 맑은 날에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보일 정도로 시야가 트여 있는데, 수평선이 쭉 뻗어있는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마음과 스트레스가 훅! 날아가는 기분이다.
초반의 설레임은 내리막이 나타나면 감동으로 바뀐다. 계단 위의 나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다. 바다가 날 품어주는 것일까, 내가 바다를 안고 있는 것일까. 이곳에는 나와 바다만 있다. 우리 사이에는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이나 바다로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파도도 없다. 같은 눈높이에서 나와 바다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넨다.
계속되는 더위와 오르막으로 당연히 힘이 들지만 풍랑이 만든 멋들어진 바다 절벽을 보며 걷다가 숲길로 들어서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약간의 서늘함 덕분에 어느새 그 힘듦은 개운함으로 바뀌어 있다. 오르지 않은 자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개운함은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아, 숲길에서는 중간 중간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과 꽤 가까이에서 마주칠 수 있는데 그럴 때 말들이 놀라면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 큰 소리를 내거나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권한다.
사실 제주의 올레길은 각 코스만의 매력을 품고 있어 따로 순위를 매기기는 힘들지만 아무래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했던 곳들은 더욱 특별하게 기억된다.
남편이 힘들게 평일에 휴가를 낸 어느 금요일, 딸이 학교에 간 틈에 우리 둘이서만 집을 나셨다. 그날의 코스는 김녕과 구좌쪽의 올레길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반짝였던 바다와 잠시 쉬어가며 마셨던 구좌의 명물인 당근주스의 진한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카페 마당에서 진한 당근맛을 느끼며 도란도란 이야기했던 그 순간과 그때 우리 앞에 쭉 이어져 있던 수평선도 어제처럼 느껴진다.
구좌는 맛있는 당근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 근처만 가도 대부분의 카페들이 '당근주스, 당근케이크 판매'라는 안내판을 내걸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근케이크도 좋지만 당근주스는 꼭 마셔볼 것을 추천드린다. 다른 곳보다 달고 진한 '찐 당근'의 맛 볼 수 있는데, 이곳의 당근주스는 정말 오직 당근만이 주인공이다.
당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올레길에서 벗어나 제주의 채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제주에서 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제주의 채소는 희안하게 다 맛있다. 양배추도 더 크고 아삭거리며 단맛이 있고, 단호박도 단단하면서 더 달콤하고, 초당 옥수수는 말할 것도 없고, 파프리카, 콜라비, 당근 등등 하나같이 다 맛있어서 채소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말그대로 '골라먹는 재미'가 넘쳤던 곳이다.
다시 올레길로 돌아오면, 7코스도 빼 놓을 수 없는 추억이 듬뿍 담긴 곳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올레길 베스트 5에 단골로 들어가는 명소인데, 특히 섶섬과 범섬이 보이는 해안 산책로는 꼭 한 번 걸어볼 것을 권한다. 내가 가 봤던 올레길 중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산책로가 있어서 바다로 바로 내려갈 수 있고, 무엇보다 그 길과 바다가 거의 같은 높이여서 자연이 성큼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7코스에는 딸이 좋아하는 뚱카롱 전문점과 내 취향인 밤식빵을 만드는 가게가 있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뚱카롱 집은 레스토랑으로 바뀌었고, 밤식빵 가게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살짝 아쉬웠다. 그럼에도 7코스가 품은 멋진 경치만으로도 충분히 즐기고,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길이 넓지 않은데 인도와 차도 구분도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다. 밤에는 바닥등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밝지 않아서 더욱 위험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하며, 밤바다의 분위기에 취해 사진 찍는데 몰두하거나 주변을 잘 살피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올레길을 걸으며 깨달은 나만의 노하우를 풀어보면, 아이들과 함께 걷거나 여자 혼자서 걷기에는 17길이 가장 안전하고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알작지부터 걷는다면 올레길에서 드물게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명확할 뿐 아니라 차도와 턱을 달리하여 잘 만들어진 보행로가 계속 이어져 있다. 또한 항상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라 언제 가더라도 지나친 한적함이 주는 으쓱한 느낌이 없어서 더욱 안전하게 느껴진다. 이곳이 아이들과 나홀로 여행객에게 좋은 이유는 또 있는데, 낮은 도두봉 외에는 가파른 오름이나 산길이 포함되지 않아 초보자도 걷는 재미를 알 수 있고, 길을 따라 카페나 상가들이 있어서 쉬고 싶거나 화장실이 생각날 때 들어갈 곳이 많다는 것도 다른 올레길과는 또 다른 장점이다. 당연히 걷는 내내 나와 함께 하는 바다가 선사하는 경치는 멋짐 그 자체이고, 중간 중간 만나는 해안 공원에는 놀이터와 벤치 등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경치와 인프라를 모두 잡은 특별한 코스이다.
마지막으로 4월에는 꼭 가파도 올레길인 10-1코스를 가 볼 것을 권한다. 넓은 밭에 끝없이 펼쳐진 청보리의 물결은 바다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리여리한 청보리들과 바람이 만든 잔잔한 옥빛 파도는 끊임없이 스르르 흘러갔는데 어느새 그 물결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나를 토닥토닥 달래주고 감싸주었다. 그 부드러운 위로에 마음의 근육은 느슨하게 풀려 편안함만을 남겼다.
원래 숲길 산책을 좋아하는 남편은 물론 평소 풍경에는 시큰둥한 딸까지 모두 만족하고 감탄했으며 사진도 많이 찍은 곳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데, 다시 한번 청보리철의 가파도는 강력추천한다!
제주 올레길은 넘치는 매력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 만큼 길안내가 잘 되어 있다. 오렌지색과 파란색이 함께 묶여 있는 리본이 올레길 곳곳에, 특히 갈림길에는 반드시 있는데 이것은 귤과 바다를 의미하는 올레길 표식으로 이 리본을 잘 찾으면서 가면 초행길도 그다지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제주도 길은 잘못 들면 인적이 거의 없는 험한 숲길이 갑자기 불쑥 나오는 경우도 있으므로, 불확실한 느낌을 믿지 말고 반드시 올레길 표식을 따라 갈 것을 당부드린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제주도에는 귤과 바다 외에도 수많은 보물들이 가득함을 느끼고, 또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