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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으로 Oct 29. 2022

한라산 등반기1

-백록담은 안 봐도 괜찮아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산을 참 싫어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 엄마의 영향이 크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산을 참 좋아하시는데, 산악회 남자 회원들보다 월등히 빨리 정상을 찍을 정도로 등산 실력도 남다르시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 우리집 휴가지는 항상 산이었다. 설악산, 지리산 등등 한국의 명산으로 이름난 곳은 좋든 싫든 가야만 했고, 일요일에도 툭하면 관악산을 반강제로 올라야만 했다. 


 휴가 때 설악산 같은 명소로 가는게 왜 싫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만약 경치를 즐기며 적당히 오르다가 내려왔다면 나도 이렇게 산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의 등산 역사에 '적당히'는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의 체력과 한계와는 상관없이 우리 가족은 마치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가 가훈인 것처럼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만 했다. 설악산에 갔을 때 울산 바위를 오르기 위해 수없이 밟아야만 했던 계단은 지금도 지긋지긋한데 아무튼 그 덕분에 나에게 산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고생 바가지로 기억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제주에 와서도 오름은 나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는데 오름이 포함된 올레길들도 꽤 있다보니 육지에서 살 때보다 본의아니게 부쩍 산을 많이 타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은 한 가지 사실.

 "아, 나 역시 엄마 딸이구나.".  

  

 결코 무리해서 속도를 낸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나는 앞서 가던 사람들보다 한걸음 먼저 정상에 도착했고 심지어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그런 일이 오름을 오를 때마다 반복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슬슬 등산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사라졌나 보다. 그래서 남편이 한라산을 가자고 제안했을 때 덥썩 받아들인게 아닐까.


 제주도에서 살기 전까지 나는 한라산에는 백록담으로 가는 하나의 코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어승생악, 어리목, 영실, 성판악, 관음사 등 여러 개의 등산 코스가 있었고 각각의 해발고도와 경치도 모두 달랐다. 갑작스레 선택지가 늘어나니 어디를 가야할 지 고민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덜해서 좋았다. 


  어쨌든, 산은 피하고 싶지만 서류상으로는 이제 제주도민인데 그래도 한라산은 한 번 가봐야겠다 싶어서 어느날, 남편의 제안대로 가장 짧은 코스라는 어승생악으로 향했다. 


  "한 30분이면 정상이라던데? 쉽게 올라간대."


  한라산으로 가는 커브길을 운전하며 남편이 한 말인데, 결론적으로 이 정보는 완전 잘못된 정보였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인데, 틀린 정보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컸기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일단 등산 시간 30분. 오케이. 이건 맞다. 보통 평지를 운동으로 걸을 때 내 속도는 빠른 편이어서 약간의 오르막이 있어도 1km를 8-9분대에 간다.  이런 내 걸음 속도로 정상까지 30분이 채 안 걸렸으니 보통 속도의 성인들도 대략 30-40분이면 다 오를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난이도. 쉽게 올라간대. . . 쉽게 올라간대. . . 쉽게 올라간다며! 누가? 누가 쉽게 올라갔을까? 


 한 마디로 어승생악은 짧고 독하다. 고도는 높지 않으나 가는 길 내내 내리막은 없고 가파른 경사가 계속 위를 향해 이어진다(오름 중에서 애월에 있는 새별오름이 약간 비슷한 스타일인데 어승생악보다 새별오름이 더 짧고 경사도 갈만한 편이다). 등산이라는 것이 원래 오르막을 타는 것이기는 해도 중간 중간 내리막도 나오고 완만한 구릉도 만나면서 당근과 채찍이 함께 있어야 힘들어도 오를 맛이 나는데 어승생악은 그런면에서 참 고집스럽게 체감상 거의 70-80도가 아닐까 싶은 가파른 경사만 허락한다. 


 그런데 또 내가 누구인가. 여간해서는 산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지만 막상 가면 최선을 다해 오르는 것이 내 스타일아닌가. 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금세 등산에 집중해 성큼 성큼 쉬지 않고 올랐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울창한 나무들이 장관을 이루는 멋진 풍경을 둘러보며 역시 다시는 산에 오지 않겠다고, 이것으로 한라산을 오르기는 올랐으니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완전 나의 오산이었다.). 어쨌든 잠시 경치를 보며 기다리니 먼저 등산을 오자고 했던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왔네! 박수! 박수!"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거친 호흡을 연신 내쉬었고 얼굴은 완전 빨갛게 달아올라 매우 지쳐보이기는 했지만 운동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온 것이 대견해서 폭풍 칭찬을 해주며 얼른 물과 챙겨온 사탕을 건넸다. 


  "와! 경치 멋진데!"

 

   한 숨 돌린 남편의 눈에 그제야 경치가 들어왔나보다. 남편은 평소에도 자연 경관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구름에 둘러싸인 산등성이와 광활한 한라산의 모습에 연신 감탄하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상 전망대 곳곳을 다니며 사방을 둘러보던 남편이 즐거운 표정으로 툭 뱉은 말.


   "진짜 멋진데! 한라산 다른 코스도 다 가 보자!"


 네? 여보세요? 지금 진심인거야? 이 정도도 힘들어하면서 다른 코스는 어떻게 오르려고? 어승생악이 30분 코스라면 영실과 어리목은 각각 5.8km, 6.8km로 2시간 30분, 3시간 정도 잡고 가야 하는 곳이다. 5-6km라 하면 '얼마 안 되네.'라고 가볍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텐데, 평지와 산의 거리를 차원이 다르다. 오르막이 계속되고 해발고도가 높아서 호흡도 버겁고 평지보다 체력 소모가 훨씬 크다. 또한 그만큼 제 속도도 낼 수 없을 뿐더러 내려오는 것까지 고려하면 체감되는 거리감은 등산로 km 곱하기 2를 하면 된다. 


 어승생악 위에 어리목과 영실이 있다면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관음사과 성판악이 있다. 이들 코스는 백록담으로 가는 코스들로 앞선 등산로들과는 차원이 다른데 한 코스만을 왕복해도 되고 등산과 하산 코스를 다르게 계획해서 한 번에 두 코스를 다 갈 수도 있다. 관음사 탐방로는 성판악 코스보다  경치가 멋지고 거리가 짧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신 훨씬 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한라산 공식 홈페이지에도 관음사 편도 8.7km  정상까지 5시간, 성판악 편도 9.6km 정상까지 4시간 30분으로 나와있으니, 거리가 짧은 관음사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만 봐도 그 난이도가 어떠한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관음사 등산-성판악 하산으로 코스를 정한다면 총 18.3km에 대략 8-9시간은 걸리는 것이다. 


  이 코스들을 내가 갈 것 같아? 나 같이 산을 싫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경치에 취한 남편을 뒤로 하고 나는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곳에 더 오래 있으면 정말 매주 한라산으로 끌려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 조심 밟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했다. 


  '한라산아 안녕! 짧고 독하게! 딱 좋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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