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안보와 권력(패권) 중 무엇을 우선시하는가?

따로국밥도 처음에는 한 번에 섞어 나왔다.

by Belleatriz

결론부터 제시하자면, 국가의 생존을 위해 안보와 권력(패권) 중 무엇을 우선 시 하는지에 있어, 두 개 중 하나만을 더 우선 시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패권이 곧 안보를 불러온 경우도 있었고, 역으로 안보가 곧 패권을 불러온 경우도 있었다.

귀납적인 예시로써는 대항해시대의 영국은 카리브해(海)에 식민개척으로 안정적으로 설탕과 럼(rum)을 브리스톨(Bristol) 항구로 수급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이후 프렌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을 영입해 패권(권력) 안보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게 안보를 제공함으로써, 나일강 삼각주의 풍부한 산물을 제공받을 수 있는 권력(패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떠한 운동(phoras)과 흐름(rhous)에 대한 지각(noesis)에 대한 맥락 속에서의 실천치(phronesis)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국가단위에서의 실천치(prudence)도 연상될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류의 담론을 구축하고 있는 이론가들의 논의를 반증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써 왈츠가 꽃피우고, 미어샤이머가 만개시킨 구조주의적 현실주의 담론은 “미국”의 대내적(및 대외적) 정책을 어떻게 기술해 나갈지에 대한 제언에 가까운 이론이며, 시대적 상황에 의해 두 학자의 견해가 미국에 의해 발탁된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상식>에서 언급했듯, 기계의 모든 바퀴들이 어느 하나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에서는 어떤 힘이 가장 큰지, 어떤 힘이 지배적인지만 알면 된다. 큰 힘은 항상 작은 힘을 끌어당기기 마련인 법이고, 다른 힘이 개입해 운동속도를 늦출 수도 있겠지만 멈추려는 시도는 무위로 번번이 돌아간다. 이는 왈츠와 미어샤이머(의 경우 그의 01년 저서인 "강대국 국제정치 비극"의 책 제목에서부터) 스스로가 시인하듯, 구조주의적 현실주의는 강대국지향적(그리고 국가중심적)이며 그들의 움직임으로써만 여타 군소 국가의 행동이 설명될 수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뉴저지에 있는 토마스 페인의 동상

물론 페인은 이 비유를 통해 이 동력기관(혹은 구조)은 최초의 동력이 결국 끝까지 소모돼 시간이 지나야 만 원하는 속도에 도달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렇기에 영국이 주도하는 질서(혹은 구조) 속에서 미국의 어머니는 영국이 아닌 유럽이기에 미국 독립을 촉성한다며 이 비유를 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신냉전과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경제적 동력에 더욱 힘입어 지금까지 달려온 ‘욕망이라는 이름의 미국산(産) 전차’는 과연 (구조주의적 현실주의자들에게) 어떠한 새로운 동력기관이(혹은 기관사가) 나오게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철마는 아직 지칠 겨를 없이 달리는 중이다.

아니면 자유로운 나라 아메리카에서는 법이 곧 왕이니,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권리 속에 분산시켜야 한다는 페인의 제언처럼, 세계시민주의적 가치가 앞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1648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국가는 ‘대내적 최고, 대외적 독립’이란 가치를 동등하게 수혜 받았다는 논의와 함께 구성된 지금의 담론은, 의사결정의 비민주성이 보이는 국제기구에서부터 삐걱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니콜라스 스파이크먼 <평화의 지정학> 中

무엇보다 역외균형자로서 자유주의 향기를 뿜으며 공화주의적 견제와 균형을 취하라는 16년도 논문 "The Case for Offshore Balancing A Superior US Grand Strategy" 속 왈트와 미어샤이머의 제언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데, 그렇다면 동아시아 속에서 미국의 역외균형전략의 윤곽이 점점 잡혀가는 와중, 한국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워싱턴 D.C. 내셔널몰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의 조형물

나아가 "만약"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고조시킴으로써 NATO 지휘체제를 구체화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로 그 기능을 다해버려 한국전쟁이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는 불리게 됐다면, 전쟁 참전 용사 세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미리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Fine.




공통적으로 왈츠와 미어샤이머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묵시적으로 새로운 역외의 적이 부상하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를 고집한다. 그들에게 양극체제는 필연이고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왈츠의 경우, 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체제 질서라고 언급한 경우도 있지만, 미어샤이머는 한결같이 미국은 지역 패권국에 가깝다고 원용하며 왈트와 함께 역외균형자 전략을 주장해오고 있다.

왈츠의 논의의 정수인 79년에 출판된 <국제정치이론(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의 경우, 81년부터 시작되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 주도의 신냉전의 정책에 힘입어 힘의 배분(Distribution of Power) 상태에서 양극체제가 가장 안정적이다는 그의 이론의 적실성을 높여줬다. 실례로, 레이건 대통령이 전국 복음주의 교회 총회(總會)에서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천명한 부분은 구별짓기를 통해 명시적으로 소련을 악으로 타자화하는 과정으로, 서구 세계관 속에 뿌리내린 이항대립의 구조를 국가단위에 불살라 올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외부 세력이 국가 행동지침을 어떻게 규정 내려줄지에 대한 설명뿐, 국내정치와 국력에 대한 정의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환원주의자(reductionist)라는 낙인을 찍는 왈츠의 주장은, 곧 국가 자체를 속이 꽉 찬 하나의 거대한 당구공으로 격하시켜 단순하고 간결하게(parsimony) 국가를 조망하도록 만들었다. 종합적으로, 왈츠의 이론은 곧 거대한 당구대 위에 놓인 균질한 당구공들의 움직임으로 평할 수 있다.

미어샤이머의 경우도 발탁된 과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딕 체니를 필두로 한 네오콘(neo-conservative)의 직관적인 미국 우월주의로 표출로 인해 “악의 축” 천명과 함께 테러라는 히드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지만 (미어샤미어 또한 이 시기의 정책이 오판이었다며 질타한다), 그의 2001년 작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은 니콜라스 존 스파이크먼의 지정학과 함께 결합돼 201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원초적 vs 투박한 예외주의

세련된(?) vs 원초적 예외주의

부시 행정부부터 지속적으로 얘기가 나왔던 신속대응군 계획은 2010년대부터 가시화됐으며 (한국에 배치되는 미군이 순환근무로 전환된 것도 이것의 연장선인 것으로 알고 있다), 미어샤이머의 이론과 핵심적인 주장 중 하나인 역외균형전략은 점진적으로 적실성을 높여왔다. 또한, 왈츠가 설명하지 못한 핵과 국력에 대한 설명력을 군사력(공격방어균형)을 통해 얻음으로써, 핵의 배치를 통해서 역내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언급되어 있듯, 분명 평화정책은 즐겁기는 해도 위험한 정책이다. 폭력적인 것과 강력한 적 사이에서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힘이 곧 정의인 곳에서 절제나 정의는 강자에게 어울리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주장에 덧붙여 게르만족의 특성으로 타키투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게르만족)은 적들을 서로 화해시키고, 인척관계를 맺고, 부족장을 선출하고,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중대사를 대개 연회장에서 논의한다. 다른 때에는 마음이 어떤 생각을 향해 그토록 활짝 열리거나, 숭고한 생각에 그처럼 열광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종족은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교활하지 않은 터라 그런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속생각까지 털어놓는다. 그래서 각자는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다 개진한다. 이튿날 주제가 다시 논의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번의 기회를 모두 활용하니, 기만할 수 없을 때 심의하고, 실수를 범할 수 없을 때 결정하기 때문이다." - <게르마니아> 中, 타키투스 천병희 역.


만약 미어샤이머의 주장처럼, 핵을 배치하게 된다면 주변 강대국들에게 강제로 절제와 자제력을 부여할 수 있게 되기에 평화를 달성할 수는 있다. 양가적이게도 핵을 보유한 국가는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핵을 발사할지 말지에 대해 끊임없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외면상로 평화는 달성되었다. 어떠한 분쟁도 존재하지 않고, 누구도 피를 흘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평화가 과연 (대다수가 평화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현실주의란 학파의 성향 상 인간의 근원적 본성 중 하나인 이기심에 기반한 논의인 바, 자기 예언적(self-fulfilling prophecy)이고 필연적(apocalyptic)이다. 결국 이는 현실세계의 시간흐름과 시계 상의 시침과 분침이 들어맞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쳐다만 보도록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어샤이머의 주장은 유럽에서 큰 인기가 없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왈트와 함께 저서한 16년도 논문 "The Case for Offshore Balancing A Superior US Grand Strategy"에서 제언한 NATO를 유럽에 이양하라는 그의 주장은 사뭇 서늘하게 들리기도 한다.


미국에서 발흥된 국제정치학은 마치 자유주의와 현실주의를 필두로 고장 난 시계를 만드는 것만 같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현실주의는 고장 난 시침과 분침을, 역사는 그래도 (물질적으로든 뭐든) 어쨌든 진보한다는 자유주의는 시계의 시계판을 로마자로 숫자를 새겨서 그려내 고장 난 시침과 분침밑에 얹어두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주의는 인간성의 이기심과 본디 악함을 간결성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파멸의 순간만이 도래하기를(즉 시침과 분침이 실제 시간과 맞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고, 자유주의는 그럼에도 우리는 이성적이고 이상적이며 미국주도로 만들어진 질서가 앞으로 어떻게 구축될 것인지 예언하는 석판을(즉 로마자로 원판에 눈금을 그려내) 찍어낸다. 마치 3차원의 세상을 z 축은 절단시킨 채 x축과 y축 선상에서만 분석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담이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그린위치(Greenwich) 천문대를 기점으로 한 시간의 개념(Greenwich Mean Time)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같은 그린위치 타임존에 있는 인근지역이더라도 각 동네의 시간은 상이했으며, 기차를 운행하는 회사와 기관사는 거쳐가는 모든 동네들의 시차를 꿰면서 동네마다 예정도착시간과 출발시간을 통보하는 업무를 수행하며 기찻길에 올랐다.

이 비유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왈츠와 미어샤이머의 현실주의와 그 안티테제로서의 자유주의는 지극히 개인적이며(혹은 국가적이며) 절대적이지 아니하다는 점을 짚어내고 싶다.

아무런 행동도 안한 채 고장 난 시계 속 시계판과 시침과 분침만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특히 지성인으로서는)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일이지 않을까? 한낱 종이에 적혀있는 로마자로 적힌 판은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데 말이다.

종이에 적혀 있는 시간 상(像)에서 벗어나 실제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일어났는지를 귀납적으로 탐구함으로써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이러한 학문적 접근을 취하는 학파가 영국학파(English School)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한다.) 그제야 비로소 상보성에 대한 이해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Da Capo al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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